“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주님께서는 오늘 왜 이 비유들을 드셨을까?
오늘은 이 비유들을 묵상타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교회를 욕심 부리는 것에 일침을 놓으시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너무 작은 교회 현실에 실망치 말라고 격려키 위해서일까요?
그 어떤 것인지 지금 제 성서지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제 입장에서 나름대로 추측해봅니다.
씨앗은 겨자씨가 아니어도 다 작습니다.
아무리 큰 씨앗일지라도 나무보다는 작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가 나오는 것이니
씨앗의 현실은 작지만 씨앗의 가능성은 큽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씨앗은 작지만 큰 나무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작은 씨앗을 가져다가 자기정원에 심습니다.
씨앗과 나무는 이러하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기에
가져다가 심지만 영적인 것에 적용을 하면
무엇이 큰 나무가 될 씨앗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더군다나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인지
악령들이 지배하는 나라의 씨앗인지 알 수 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나중에 크게 자랄 씨앗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을 것,
달리 얘기하면 가능성을 보고 그 일을 시도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게 씨앗인 줄 모르기에 포기하고 안 심습니다.
이런 많은 사람들에 비해 저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좋은 의지와 많은 아이디어/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씨앗이라고 생각하기에 일단 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갈등이 따릅니다.
제가 옛날에 북한, 중국, 러시아 선교를 하려고 할 때
자주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선교하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인가,
아니면 이것 또한 내 욕심의 씨앗일까 생각하곤 했지요.
그리고 지금 선교 협동조합을 시작하려고 하면서도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것일까,
하느님 나라를 위장한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계속 갈등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괴롭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갈등을 하는 것 자체가 제 욕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욕심이 하나도 없다면 왜 갈등을 하겠습니까?
아무런 갈등이나 주저함 없이 밀고 나가겠지요.
사실 제 마음 정원에는 밀을 심었는데 가라지가 뿌려진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씨앗도 있고 욕망의 씨앗도 있고
우리의 공동체라는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비관이 아니라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가라지 때문에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계속 추진하려고 합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제 평생 신조처럼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있는 것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가라지를 뽑아내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계속할 것입니다.
제가 심은 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분명하다면
그 작은 것이 크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라질 거라 믿으면서!!!
신부님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