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한국의 순교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프란치스코의 성인의 권고 말씀 그대로입니다.
성인들의 업적을 그저 이야기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른 그 성인들을
우리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성인들은 주님을 뒤따랐고
우리들은 성인들을 뒤따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의 초대, 즉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마디에 특별히 비중을 두었습니다.
“날마다”
결정적으로 한 번 자기 목숨을 바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작은 순교입니다.
일상의 작은 순교,
그것은 큰 것이 아니고 큰 결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니
어쩌면 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작기에 지나치기 쉽고,
그렇기에 매순간 깨어 자기를 버리고,
매순간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이니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포함하여 우리 형제들이 일상에서
잘 하지 못하는 것,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는데
주님을 따르기 위한 두 가지 요소 중
나이든 형제들은 자기를 버리는데 약하고
젊은 형제들은 십자가를 지는데 약하다는 점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한 편으로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나이든 사람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 쉽지 않고
젊은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르기 위한 자기 버림을 먼저 보겠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주님께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순교자들과 같이 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이든 형제들이 자기를 버리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했는데
대부분 나이만큼 오랫동안 길들여진 것들을 놓지 못하는 것이고
나에게 익숙한 것들을 놓지 못하는 것인데
어떤 것들은 별 것이 아닌 것들입니다.
자기가 해 오던 것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
자기의 습관이나 주장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
좋은 전통의 유지, 溫故而知新이라는 이름 아래 옛것을 고집하는 것.
자기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아야 마음이 편해 그 자리를 고집하는 것.
자기 성무일도 방식을 고집하는 것.
이에 비해 젊은 형제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러니 나이 든 형제들은 과거 회귀적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젊은 형제들은 미래적 갈망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젊은 형제들이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을 잘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나이든 사람만큼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좋고 싫음이 가장 중요한 포스트모던 사회,
감성세대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과거 위계적 봉건 사회에서는 어른이나 공동체가 원하면
속으로는 꿍시렁거릴지언정 싫어도 하고
합리성이 중요한 모더니즘의 사회에서는 이치에 맡기만 하면
싫어도 하고 힘들어도 해낼 수 있었는데
자기의 싫고 좋음이 가장 중요한 포스모더니즘 시대의
젊은 사람들은 싫은 것은 싫다고 또박또박 표현하고
하려고 해도 잘 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나이든 형제들이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기 힘들어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고
더럽고 불편한 것을 진득이 참지 못하고
불편한 자리나 불편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여 피해버립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가 버리는 데 약점이 있고
십자가를 잘 지지 못한다 해도
그런 나와 나의 약점을 보지 않고 주님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순교자들의 얘기를 영적 독서하는데
그들 중에는 우리처럼 약함 때문에 배교를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출발하여 순교에 이르렀습니다.
나를 보면 불가능하지만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면 가능하고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면 가능합니다.
그 사랑에 끌려 주님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고
그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순교의 성인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대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본 분들입니다.
그것도 흘낏 건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Attendo하신 분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봐봤자 별 매력이 되지 못하기에
주님 사랑만을 한 눈 팔지 않고 보신 것이요,
다른 것들은 기대해봤자 별 힘이 되지 못하기에
주님께만 매달리어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의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영적 권고 6번)
그런데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프란치스코의 성인의 권고 말씀 그대로입니다.
성인들의 업적을 그저 이야기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른 그 성인들을
우리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성인들은 주님을 뒤따랐고
우리들은 성인들을 뒤따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의 초대, 즉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마디에 특별히 비중을 두었습니다.
“날마다”
결정적으로 한 번 자기 목숨을 바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작은 순교입니다.
일상의 작은 순교,
그것은 큰 것이 아니고 큰 결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니
어쩌면 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작기에 지나치기 쉽고,
그렇기에 매순간 깨어 자기를 버리고,
매순간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이니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포함하여 우리 형제들이 일상에서
잘 하지 못하는 것,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는데
주님을 따르기 위한 두 가지 요소 중
나이든 형제들은 자기를 버리는데 약하고
젊은 형제들은 십자가를 지는데 약하다는 점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한 편으로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나이든 사람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 쉽지 않고
젊은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르기 위한 자기 버림을 먼저 보겠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주님께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순교자들과 같이 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이든 형제들이 자기를 버리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했는데
대부분 나이만큼 오랫동안 길들여진 것들을 놓지 못하는 것이고
나에게 익숙한 것들을 놓지 못하는 것인데
어떤 것들은 별 것이 아닌 것들입니다.
자기가 해 오던 것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
자기의 습관이나 주장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
좋은 전통의 유지, 溫故而知新이라는 이름 아래 옛것을 고집하는 것.
자기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아야 마음이 편해 그 자리를 고집하는 것.
자기 성무일도 방식을 고집하는 것.
이에 비해 젊은 형제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러니 나이 든 형제들은 과거 회귀적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젊은 형제들은 미래적 갈망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젊은 형제들이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을 잘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나이든 사람만큼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좋고 싫음이 가장 중요한 포스트모던 사회,
감성세대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과거 위계적 봉건 사회에서는 어른이나 공동체가 원하면
속으로는 꿍시렁거릴지언정 싫어도 하고
합리성이 중요한 모더니즘의 사회에서는 이치에 맡기만 하면
싫어도 하고 힘들어도 해낼 수 있었는데
자기의 싫고 좋음이 가장 중요한 포스모더니즘 시대의
젊은 사람들은 싫은 것은 싫다고 또박또박 표현하고
하려고 해도 잘 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나이든 형제들이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기 힘들어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고
더럽고 불편한 것을 진득이 참지 못하고
불편한 자리나 불편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여 피해버립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가 버리는 데 약점이 있고
십자가를 잘 지지 못한다 해도
그런 나와 나의 약점을 보지 않고 주님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순교자들의 얘기를 영적 독서하는데
그들 중에는 우리처럼 약함 때문에 배교를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출발하여 순교에 이르렀습니다.
나를 보면 불가능하지만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면 가능하고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면 가능합니다.
그 사랑에 끌려 주님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고
그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순교의 성인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대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본 분들입니다.
그것도 흘낏 건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Attendo하신 분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봐봤자 별 매력이 되지 못하기에
주님 사랑만을 한 눈 팔지 않고 보신 것이요,
다른 것들은 기대해봤자 별 힘이 되지 못하기에
주님께만 매달리어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의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영적 권고 6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