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을 때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가
늘 내 맘에 남는다.
수없이 성당에서 하는 연극무대에 올려지곤하는 이 복음이
그냥 우리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누군가가
"신부님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 같아요."라고 했다.
인연에 집착해서는 안되겠지만
나는 "사랑의 최고 표현은 스쳐가는 인연에 소홀하지 않는 것"이라 늘 여긴다.
그것이 순간에 충실한 것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에 충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고
깨달음의 기쁨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
그 자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목적은
그 깨달음을 '지금 여기서'(hic et nunc) 사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스쳐 지나가게 하시는 그 인연에 눈을 한번 돌려보자.
그 인연은 TV를 통해서도
성당가는 길목에 마주치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공식적인 만남이나 모임을 통해 다가오는 낯선 인물을 통해서도
손님의 모습으로 우리 가게에 들리는 그 누구를 통해서도
그분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시는
오늘의 인연임을 의식하기만 한다면
절대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으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오늘 주님께서는
또 누구를 나에게 보내주실까?
하느님의 선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을 때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가
늘 내 맘에 남는다.
수없이 성당에서 하는 연극무대에 올려지곤하는 이 복음이
그냥 우리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누군가가
"신부님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 같아요."라고 했다.
인연에 집착해서는 안되겠지만
나는 "사랑의 최고 표현은 스쳐가는 인연에 소홀하지 않는 것"이라 늘 여긴다.
그것이 순간에 충실한 것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에 충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고
깨달음의 기쁨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
그 자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목적은
그 깨달음을 '지금 여기서'(hic et nunc) 사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스쳐 지나가게 하시는 그 인연에 눈을 한번 돌려보자.
그 인연은 TV를 통해서도
성당가는 길목에 마주치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공식적인 만남이나 모임을 통해 다가오는 낯선 인물을 통해서도
손님의 모습으로 우리 가게에 들리는 그 누구를 통해서도
그분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시는
오늘의 인연임을 의식하기만 한다면
절대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으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오늘 주님께서는
또 누구를 나에게 보내주실까?
하느님의 선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