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 말씀,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라는 오늘 말씀을
요한복음의 말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연결시키면
배치되는 말씀처럼 들리고, 약간의 혼동을 주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요한복음에서 당신을 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길은
당신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길, 곧
하느님께서 우리게 오시는 길이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길이 되어주시는데,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길을 잘 이용만 하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가 무슨 길을 따로 닦는다는 말인가요? 새로 낸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주님이 하늘길이고
이 하늘길이 주님이 오신 길이고 또 오실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 길을 따로나 새로이 낼 필요 없습니다.
내 집 길만 내면 되고, 내 집까지도 길이 이미 나있다면
그 길을 막지만 않으면 되고 오시기 편하게 닦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늘길이시고 우리 동네까지 오는 간선도로幹線道路시라면
내 집 길은 우리 동네로부터 우리 집까지 오는 지선도로支線道路거나
그 마저도 낼 필요가 없이 하늘길이 연결되어 있다면 막지나 말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어도
우리가 그 길을 막으면 하느님도 오시지 못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맞아들이지 않은 마을이 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이 내게 오시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필요치 않아서 또는 삐지거나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워서도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저는 올해 전에는 놓쳤던 기도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대림 1주 화요일 아침청원기도에 “우리 교만의 산은 낮추시고,
우리 약점의 골짜기를 메워 주소서.”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실 길을 막는 제일 큰 죄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주님이 오실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님이시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잖아요?
이럴 때 우리는 콧대를 꺾는다고 하는데 우리 콧대가 꺾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신앙은 있지만 우리 신앙이 약하여 오실 주님을
깨어 준비하지 않거나 감히 모실 수 없다고 거절할 수는 있습니다.
지난 주 판공성사를 주는 중에 마음 아픈 얘기를 들었습니다.
매주 미사를 드리면서도 자주 점 보러 간다는 거였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여쭸더니 거기 가면 위로가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신부님도 계시고 수녀님도 있는데 왜 그러냐 했더니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어렵다고 하여 제 전화번호를 드리며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제게 전화하시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믿음이 약할 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은 무섭거나 어려워 찾지 않거나 청하지 못하고
만만한 인간에게서 위로와 힘을 찾고 얻습니다.
또 시련의 때에도 믿음이 약하면 하느님을 의심할 수도 있지요.
과연 하느님은 계시는가?
계시더라도 나를 위해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119 소방차나 구급차를 부르면 즉시 온다는 믿음이 있는데
나를 위로하고 구원하러 오시라면 오시리라는 믿음이 있나요, 우리는?
주님 오실 길을 막았던 적은 얼마나 많았나를 곰곰히 되짚어 성찰하며 주일을 보내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