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제가 처음 수도원 들어 와서 난생 처음 피정을 할 때
피정 지도 신부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릇은 그릇이로되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천지차이가 난다는 말씀.
똥으로 채워지면 똥통이 되고
밥으로 채워지면 밥통이 되고
물로 채워지면 물통이 된다는 말씀.
똥통이 물통이 되려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똥을 비워내고
물로 채워야 한다는 말씀.
사람도 이런 그릇과 같아서
욕심으로 가득 찬 자신을 비워야지만
하느님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말씀.
대충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이사 이런 말씀 흔한 말씀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저에게는 너무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말씀이어서
한 동안 저는 이 말씀만 묵상하며
제 안의 온갖 삿된 욕심을 비우려 애를 썼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갈라티아서 말씀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과 성령의 대조적 관계를 얘기하고 있고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과 주님의 성령을 대조적으로 얘기합니다.
우리말에서는 얼이 차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 것으로 얘기됩니다.
그래서 얼빠진 놈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군대에서는 빠진 얼을 차리는 기합으로 얼차려가 있습니다.
한자말은 정신을 차리기도 정신이 빠지기도 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정신이 있다, 없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정신 있더라도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하다고도 얘기합니다.
정신이 빠져서도 아니 되고
정신이 나가서도 아니 되고
정신이 없어서도 아니 되지만
정신이 있어도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하면
그런 정신은 없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썩어빠진 정신,
이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육이요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육의 정신 또는 육의 영일 것입니다.
육 또는 육의 영이 가득하면
우리 안의 그 못된 영은 우리로 하여금 못된 짓을 하게 합니다.
반대로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이 가득하면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육의 영을 몰아내기에
불륜, 더러움, 방탕, 만취, 흥청대는 술판 대신에 절제를 하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대신에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으로 나를 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의지적 선택과 성령적 의지입니다.
의지적 선택은 육의 영과 주님의 성령 중에서
성령을 선택하는 최초의 의지이이고
이렇게 성령을 선택하는 최초의 의지에
성령적 의지가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성령적 의지가 성령과 함께 자기의 육을
그 육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제가 처음 수도원 들어 와서 난생 처음 피정을 할 때
피정 지도 신부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릇은 그릇이로되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천지차이가 난다는 말씀.
똥으로 채워지면 똥통이 되고
밥으로 채워지면 밥통이 되고
물로 채워지면 물통이 된다는 말씀.
똥통이 물통이 되려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똥을 비워내고
물로 채워야 한다는 말씀.
사람도 이런 그릇과 같아서
욕심으로 가득 찬 자신을 비워야지만
하느님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말씀.
대충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이사 이런 말씀 흔한 말씀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저에게는 너무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말씀이어서
한 동안 저는 이 말씀만 묵상하며
제 안의 온갖 삿된 욕심을 비우려 애를 썼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갈라티아서 말씀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과 성령의 대조적 관계를 얘기하고 있고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과 주님의 성령을 대조적으로 얘기합니다.
우리말에서는 얼이 차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 것으로 얘기됩니다.
그래서 얼빠진 놈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군대에서는 빠진 얼을 차리는 기합으로 얼차려가 있습니다.
한자말은 정신을 차리기도 정신이 빠지기도 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정신이 있다, 없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정신 있더라도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하다고도 얘기합니다.
정신이 빠져서도 아니 되고
정신이 나가서도 아니 되고
정신이 없어서도 아니 되지만
정신이 있어도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하면
그런 정신은 없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썩어빠진 정신,
이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육이요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육의 정신 또는 육의 영일 것입니다.
육 또는 육의 영이 가득하면
우리 안의 그 못된 영은 우리로 하여금 못된 짓을 하게 합니다.
반대로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이 가득하면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육의 영을 몰아내기에
불륜, 더러움, 방탕, 만취, 흥청대는 술판 대신에 절제를 하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대신에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으로 나를 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의지적 선택과 성령적 의지입니다.
의지적 선택은 육의 영과 주님의 성령 중에서
성령을 선택하는 최초의 의지이이고
이렇게 성령을 선택하는 최초의 의지에
성령적 의지가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성령적 의지가 성령과 함께 자기의 육을
그 육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