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여러분도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나를 위한 구원의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아닌 누구에게는 구원이 발생하는 복음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구원이 발생하지 않고 지나쳐가는 소리일 뿐이지요.
저에게도 20대 중반까지는 복음이 전혀 구원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술 지상주의적인 20대 초반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책이 저를 사로잡고
토스토예프스키, 괴테, D.H 로렌스 같은 소설가들이
그때그때 새로운 물줄기를 싱싱하게 저에게 대 주었습니다.
사상, 종교 면에서도 저는 세속의 철학자들의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불교와 노자 류의 책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복음이 저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게 된 것은
고뇌의 젊은 시절 그 중에서도 절망의 3년을 거치면서입니다.
제가 추구하던 것들이 제 욕심만큼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완전한 인간을 꿈꾸던 제가 군대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고 나에게는 어림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군 생활 3년을 절망 상태에서 보내고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하고도 한 동안 그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그때 복음은 저에게 구원의 복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이 꺼졌을 때 하늘의 별이 빛을 내듯
세상에 대한 희망도
나에 대한 희망도 모두 사라졌을 때
그 어두운 심연에서 하느님의 빛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시작되는 때요
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때인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풍랑과 싸워 기진맥진해 있을 새벽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그 새벽녘,
예수님은 꼭 이때 나타나십니다.
왜 더 일찍 나타나시지 않고 이렇게 새벽녘에야 나타나시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을 때,
있는 힘을 다 쏟아 기진맥진, 더 이상 아무 힘도 없을 때,
이때가 갈망의 때요, 영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의 하느님의 개입을 체험하고도 3년여가 흘렀지만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래서 “내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소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
제자들 파견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 복음은 이때 처음이 아니라 전에도 많이 듣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복음이 구원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거룩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그래서 코헬렛은 얘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고칠 때가 있고 부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3,1-11)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여러분도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나를 위한 구원의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아닌 누구에게는 구원이 발생하는 복음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구원이 발생하지 않고 지나쳐가는 소리일 뿐이지요.
저에게도 20대 중반까지는 복음이 전혀 구원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술 지상주의적인 20대 초반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책이 저를 사로잡고
토스토예프스키, 괴테, D.H 로렌스 같은 소설가들이
그때그때 새로운 물줄기를 싱싱하게 저에게 대 주었습니다.
사상, 종교 면에서도 저는 세속의 철학자들의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불교와 노자 류의 책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복음이 저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게 된 것은
고뇌의 젊은 시절 그 중에서도 절망의 3년을 거치면서입니다.
제가 추구하던 것들이 제 욕심만큼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완전한 인간을 꿈꾸던 제가 군대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고 나에게는 어림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군 생활 3년을 절망 상태에서 보내고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하고도 한 동안 그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그때 복음은 저에게 구원의 복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이 꺼졌을 때 하늘의 별이 빛을 내듯
세상에 대한 희망도
나에 대한 희망도 모두 사라졌을 때
그 어두운 심연에서 하느님의 빛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시작되는 때요
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때인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풍랑과 싸워 기진맥진해 있을 새벽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그 새벽녘,
예수님은 꼭 이때 나타나십니다.
왜 더 일찍 나타나시지 않고 이렇게 새벽녘에야 나타나시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을 때,
있는 힘을 다 쏟아 기진맥진, 더 이상 아무 힘도 없을 때,
이때가 갈망의 때요, 영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의 하느님의 개입을 체험하고도 3년여가 흘렀지만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래서 “내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소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
제자들 파견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 복음은 이때 처음이 아니라 전에도 많이 듣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복음이 구원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거룩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그래서 코헬렛은 얘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고칠 때가 있고 부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