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찾느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
요즘 명절 풍속도가 여러 면에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고향과 어른들을 찾지 않고 외국으로 여행 떠난다든지
자식들이 부모에게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가 명절을 지내는 겁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가지 않고 부모가 자식에게 가서라도 명절을 지내는 것이,
자식 여럿이 힘든 것보다 부모 한 분이 힘 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들이
이렇게 명절 풍속을 바뀌게 한 것인데 원칙과 예의를 더 따지는
보수적인 저의 생각에는 요즘 자녀들이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이 되지요.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자녀들을 사랑하는 요즘 부모는 저처럼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자녀들에게 맞춰줍니다.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신 것도 이와 같을 겁니다.
더 보고 싶어 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보다 우리를
더 보고 싶어 하시고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오신 하느님을 우리가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아니라면
그리고 영적 장애인이 아니라면 그저 앉아서 맞이하거나
심지어는 시큰둥하게 맞이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찾아오시는 부모를 역까지 나가 맞이하고 모셔오는 최소한의 사랑과 예의는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맞이 사랑과 맞이 예의>가 우리에게도 있어야겠지요.
이런 맞이 사랑과 맞이 예의가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과 제자들에게서
보이는데 그것을 좀 뜯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구도열망들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첫 제자들이 그저 생업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무지렁이로
묘사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준비하던 구도집단에 속한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보라.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고 가리키자 즉시 따라나섭니다.
마주오시는 주님께 마주나간 것이고 마침내 따라나서기까지 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프란치스칸적인 <행동 대 행동/行動 對 行動>을 봅니다.
프란치스칸의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영성은
말할 것도 없이 동적인 영성이고 행동의 영성입니다.
물론 이런 행동을 하기 전에는 관상이 필요합니다.
관상을 하기 위한 고요와 정주定住도 필요하고요.
그래서 그들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
고요히 머물며 오로지 주님께만 집중하는 삶을 살았고 그랬기에
오시는 주님을 눈여겨보고는 메시아임을 즉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리던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행동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자기가 본 주님을 증거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제자들을 더 이상 자기 곁에 두지 않고 주님께로 쫓아 보냅니다.
제자들도 이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머물지 않고,
와서 보라는 주님의 초대에 가서 보고 주님의 제자들이 됩니다.
이 성탄에 우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노래하지만
성탄의 영성은 본래 동적인 것이고,
예수가 여기저기서 태어나도록 사랑을 나르는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알아본 그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 증거함으로써
그들도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또 다른 성탄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