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반려동물을 많이 키우고 그래서 그것이 사업화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반려동물에 대해 프란치스칸으로서 생각이 복잡합니다.
그것이 긍정적이라고도 생각되고 부정적이라고도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을 프란치스칸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고,
좋게 보지만 어떤 때 그것이 정말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냐에 대해
의문스러운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줄 모르고 그래서 반려동물은 사랑하는 것이나
정말로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는데 왜 이렇게 왜곡된 사랑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고,
반대로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인데 그것은
동물이 순종적이며 배반치 않고 사랑의 만족을 틀림없이 주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만일
동물이 키우기 어렵거나 배반할 경우 그런 동물은 키우지 않고 버릴 겁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사랑의 단계를 생각해봤습니다.
사랑을 하되 나를 좋아라하는 만만한 동물만 사랑하는 가장 낮은 단계.
인간을 사랑하되 역시 나를 좋아라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그 다음 낮은 단계.
인간이건 피조물이건 내 위주가 아니라 그의 생명을 사랑하는 꽤 높은 단계.
나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최고로 높은 단계.
사랑의 단계가 이렇게 있다면 미움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정작 이것을 얘기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은 오늘 서간이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미움은 사실은 우리가 많이 하는 것으로, 미움도 아니고
오히려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누구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에 미워도 하는 것이기에 얘기를 하다보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임이 즉시 드러납니다.
사랑하기에 제발 잘 살고 그래서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래서 그를 위해
잔소리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고집을 부리는 그가 정말 밉습니다.
그러므로 잔소리도 하고 기도도하며 미워하는 것은 사랑의 미움입니다.
그런데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고 게다가 기도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만큼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 겁니다.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라면 이 정도는 돼야 같이 살 수 있다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데도 그렇지 않을 때 미워하는 겁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화를 내면 100% 사랑이 아니라 미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그래도 미움의 정도가 심한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것이니
아직 내 마음에서 완전히 내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보다 더 심각한 미움의 단계는 파괴적인 미움의 단계입니다.
내 마음에서 내치고는 무관심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무관심할 수도 없고 내가 소유할 수 없을 바에는 파괴해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을 파괴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그 마음이 오죽할까?
그것은 돈이나 권력을 빼앗기 위해 죽이는 것과도 다릅니다.
이것은 나 잘 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는 거지만
파괴하려는 마음의 미움은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미움은 늘 남을 파괴하기 전에 자기를 파괴하는 거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늘 먼저 나를 사랑하거나 미워한 뒤에 남에게 가는 거지요.
많이 미워하되 이런 파괴적인 미움만은 하지 않겠노라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그 사랑의 시간인
오늘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