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님 말씀에 제가 토를 달면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 때문에 행복해야 하고,
적어도 원수보다 행복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원수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더더군다나 원수보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여전히 원수이고 그래서 사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수 때문에 자신은 지금 불행한데
원수는 나를 불행하게 해놓고도 벌 받지 않고 지금 떵떵거리고 산다면
아무리 주님께서 사랑하라하셔도 그 원수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이 밉고 그런 주님께 분노를 터뜨리게 될 겁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보다 행복하거나 원수 때문에 행복해져야 하는데
관건은 어떻게 원수보다 행복하거나 원수 때문에 행복하게 되느냐 그겁니다.
인간적인 오기로 원수보다 더 행복할 수는 있을 것 같고,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성공함으로써 더 행복해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을 하여 실제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설사 행복해졌을지라도 원수사랑에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행복 때문에 원수를 잊고 지낼 수는 있어도 원수가
은인이 된 것은 아니기에 인간적인 오기로 원수사랑은 불가능하고
원수 때문에 불행했던 내가 원수 때문에 행복해져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원수 때문에 불행했던 내가 원수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원수가 개과천선하고 나에게 용서를 청할 뿐 아니라 과거 자기 때문에
고통 받고 불행했던 것을 보상해줬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라면
혹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행복이 완전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역시 사람에 의해서 불행해졌다 사람에 의해 행복해지는 것이니
결국 사람에 의해 내 행불행이 좌우되고 사랑과 미움도 좌우되는 거지요.
그것은 연이 바람을 타듯 사람을 타는 것이기에 위험도 있고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연이 바람을 타고 오르듯 원수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오르는 것과
하느님 사랑에 의해 원수도 사랑하게 되는 것 두 가지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원수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오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돌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원수 때문에 우리가 증오를 품을 수도 있지만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 마침내 모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단계에 오르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지요.
우리의 원수 사랑의 의지는 하느님 사랑을 견인하는 마중물일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성령을 은총으로 주셔야만 우리는 그 사랑으로 원수까지
마침내 사랑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원수와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오늘 주님은 또 말씀하시는데
원수사랑의 의지에서 비롯된 이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의 은총이
원수에게 가기 전에 나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청원기도를 할 때 가장 훌륭한 청원기도는 하느님 자신을 주십사고
청하는 것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원수가 은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이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