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꾸시마에 해일이 덮쳐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이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 그리 된 것,
곧 벌 받은 거라고 목사님들이 말을 하여 지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도 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의 말이 잘못된 것은 너무 자신만만하게 얘기한 것입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목사님들도 후쿠시마 사태에 대해 조심하여 얘기하고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라고 바오로 사도가 또 얘기하듯
목사님들도 후쿠시마 사태를 우리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자고 그래서
우리도 회개하자고 얘기해야 했는데 우리는 문제없는 듯 말한 겁니다.
사실 어떤 재난이 일어났을 때 천재니 인재니 따지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벌이라고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지만
하느님의 벌이라는 것은 없고 다 인재라고만 얘기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벌이 없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랑을 포기하신 거라는 말과 같은 거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 때문에 벌을 내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늘 복음의 비유처럼 개과천선을 바라며
벌을 유보하는 것이지 벌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요.
오늘 비유에서 주님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베어버리려는 주인에게
벌을 1년만 유보해달라고 시간을 벌어주시는 분으로 당신을 비유하시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상을 주지 않지만 벌도 주지 않지요.
나와 아무 상관없는 그가 잘 하건 잘못 하건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자식을 끝까지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잘 되도록 상도 주고,
상이 통하지 않으면 벌을 내려서라도 잘못을 고치고 잘 되게 하려 하지요.
그러므로 벌을 내리는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랑이고,
아픈 사랑이고 더 큰 사랑입니다.
아픈 사랑이란 벌을 주면서 아파하는 사랑이라는 뜻이요
벌을 주면서 아파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식에게 매를 대면서 아프지 않은 부모가 없듯이
아파하며 벌을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헌데 같은 매질을 하지만 화가 나서 화풀이 또는 분풀이로 할 수도 있고
교육의 목적으로 그리고 벌로 할 수도 있는데
화풀이의 경우는 속이 시원하지만 벌의 경우는 내가 더 아픈 법입니다.
그리고 그러기에 벌을 주는 사랑, 아픈 사랑이 더 큰 사랑입니다.
옛날의 저를 아는 분들은 요즘의 저를 보고
옛날과 달라졌다고도 하시고, 따듯해졌다고도 하십니다.
이것이 좋은 뜻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참 아픈 말, 저를 찌르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제가 전보다는 좀 겸손해져서 따듯한 사랑을 하게 된 거라면 좋은 뜻이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사랑의 기운이 달리고 아파하기 싫어서 힘든 사랑은 않고
따듯한 사랑, 쉬운 사랑만 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요즘 위험하고 힘들고 돈도 안 되기에
외과수술 전문의 지망자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을 받을 때 두 가지를 봐야 합니다.
고쳐야 할 죄와 회개해야 할 나를 보는 것이 하나라면
벌을 주고 아파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느님은 벌을 주건 상을 주건, 쓰러뜨리건 일으켜 세우건
늘 내 옆에 계시는 야훼(있는 나이신) 하느님일 뿐 아니라
우리 조상들 때부터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탈출기의 말씀을
우리는 오늘 마음에 새기도록 하십시다.
제가 사람답게 잘 살아가기를 애간장이 타는 마음으로 제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바라보고 기다려주는 헌신적인 그 누군가의 사랑을 뒤 늦게야
알아차리고, 그 사랑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회개를 계명차원으로 생각한다면 마른 나무에서 물을 짜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사랑만이
가능하다 싶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는 말도 있듯이...
어디선가 읽은 글이 기억이 나네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 만가지고는
세상을 살아가기는 어렵다. 인간 조건이 그렇다.”라는 말...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저를 위하여 인간 예수로 이 세상에 오시어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무던히
애간장을 태우셨다는 걸 알아듣는다면 어찌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합당치 못한 저는 회개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 열매를 맺겠지요.“
회개의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이 사순절을 보낼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