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요한복음에서 필립보 사도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주님을 따른 첫 제자 그룹에 속하기 때문만 아니라
주님과의 영적 대화가 가능한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제 수녀원에서 미사를 드리고 식사를 하였는데
곧 첫 영성체를 할 아이들 얘기를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아이들 중에 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
예를 들어 ‘하느님은 남자에요, 여자에요?’와 같이 하느님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심을 두고 질문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10세 안팎의 아이가 이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남다르지요.
영적인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데
그저 먹는 것, 노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오늘 필립보 사도도 이런 면에서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면 남다릅니다.
오늘 필립보 사도가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고
다른 사도들이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도들은 아버지를 이미 뵙고 필립보만 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은 주님과 그리 오래 있었고 그래서 주님의 그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영적인 말씀을 수없이 들었어도 그것이 뭔 말인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법구비유경 우암품에 나오는 말씀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이를 친하는 것은 마치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이
아무리 오래도록 가까이 하여도 그 법을 알지 못하네.
어진이가 지혜로운 이를 친하는 것은 마치 혀가 음식 맛을 알 수 있듯이
비록 잠깐 동안 가까이 하더라도 참다운 도의 뜻을 아네.”
그러니까 국자가 아무리 오랫동안 국에 잠기어있고 국을 남에게 퍼주어도
실은 국 맛을 모르고 오직 혀만 그 맛을 알듯이 영적인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주님과 오래 있어도 주님 말씀을 알지도 궁금치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 하시고.
당신을 봤으면 하느님 아버지를 이미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어도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이 뭔 말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답답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아서 아무 소리도 않고 있는데 필립보만 그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고 싶고 뵙고 싶어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숨겨놓고 안 보여주셔서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볼 수 없으니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필립보 사도는 하느님을 보고 싶은 열망이랄까 갈망은 있지만
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음악적인 소질과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아직 레슨을 받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육적인 욕망이 죽어야 영적인 열망이나 갈망이 생기고,
세속적인 정신이 죽고 주님의 영이 내 안에 머무셔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제자들의 세속 욕망이 좌절되자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게 되었고,
그 성령께서 보이는 것들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게 하시지요.
육과 육의 욕망이 처음에는 죽임 당하나
다음부터는 스스로 이것들을 죽일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영적인 능력을 배양하는 것임을
필립보와 야고보 두 분 사도에게서 배우는 오늘 축일입니다.
다음부터는 스스로 이것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