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십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
하여
광야에서 예수님은 외로우십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겪으실 고독을 앞서 체험하십니다.
당신을 따랐던 그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도 떠나고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세 제자도 쿨쿨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당신 곁에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괴롭다 해도 아무도 당신 마음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외로움은 누가 옆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있다 해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의 십자가 고통 앞에서 너무도 고독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혼자 져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어머니도 이 십자가는 대신 질 수 없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절대 고독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 되고
이 절대 고독이 기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광야의 고독 가운데서
하느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광야의 고독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해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어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알 듯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합니다.
이런 면에서 집안에서는 가장이 가장 고독하고,
직장에서는 최고 경영자가 가장 고독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장상이 가장 고독하고,
더 올라가면 하느님께서 가장 고독하십니다.
제가 관구장을 할 때입니다.
형제들은 힘들다는 하소연을 저에게 쏟아놓습니다.
형제들은 불만도 저에게 다 쏟아놓습니다.
저희 수도회 여러 문제들을 저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해결책을 내 놓으라 합니다.
저 또한 같은 인간이고
그래서 힘들고 하소연하고 싶고 불만을 터뜨릴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형제들은 이런 저에게 온갖 것을 쏟아 붓고
저는 달리 터뜨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 때
누구 의지할 데를 찾기보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쓰레기를 쓰레기통이 받아들이는 덕분에 방이 깨끗하지요.
만일 쓰레기통이 쓰레기 받아들이기를 싫다하면
온 방이 지저분하겠지요.
‘그래 내가 형제들의 쓰레기통이 되어 주자!’
‘그리고 가장 큰 쓰레기통인 하느님께 쏟아버리자!’
‘나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찾아가 하소연하지 않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한탄하지 않고 하느님께 한탄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힘을 얻지 않고 하느님께 힘을 얻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사순절 우리의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 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느끼셨던 고독은
우리에게 교훈적입니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그러시나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겠지?”
두 번째로 광야에서 예수님은 배고프십니다.
광야에는 돌덩이밖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여 사탄이 다가와 예수님께 유혹을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우리는 이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안심도 하게 됩니다.
유혹을 받으시기까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심에 감사드리고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시니 수없이 유혹받는 우리도
유혹 자체가 죄가 아님에 안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고 감사만 드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유혹의 본질을 깨닫고
유혹을 통하여 하느님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유혹은 배고픈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배부른 사람은 식욕이 없고
식욕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는 법이지요.
이것은 비단 먹는 것 뿐 아닙니다.
없을 때 소유욕이 생기고 소유욕이 있을 때 유혹을 받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자가 하는 짓은
뱀이 하와에게 부족한 것, 없는 것을 일깨우듯
없는 것을 일깨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고 가지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돌을 내밀며
당신은 빵은 없고 돌밖에 없으니
당신의 능력으로 빵을 만들어 식욕을 채우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빵은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유혹자가 많습니다.
명품을 걸치고 와서 내게 명품이 없음을 일깨우고
소유욕을 부추기며 유혹합니다.
갖가지 없음을 일깨우고 욕심을 부추기며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도 배고프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뱀이 가지지 못한 것 하나를 일깨우니 못 가진 것만 보고
가진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못 가져서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못보고 못 누리기에 불쌍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욕심내는 것을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배고프고 궁핍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에 대한 욕구를 단식을 통하여
말씀에 대한 욕구로 바꾸십니다.
아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빵에 대한 욕구를 잠재웁니다.
우리도 사순절 단식으로 우리의 온갖 욕구를 영적인 갈망으로 바꾸고
하느님 말씀, 즉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께서는
광야를 나와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단식으로 복음을 소유한 행복을 당신 혼자 소유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그 복음, 그 행복을 나누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나도 행복하니,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김 추기경의 말씀과 같습니다.
나누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줄 수 없는 법이지요.
같은 이치로 행복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나누지 못할 것이고
나눌 마음이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기 혼자 행복한 것을 미안해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주고도 나누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행복한 우리는
기도와 단식으로 우리 시대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불행한 사람에게
우리의 행복을 나누어야 하고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자선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
하여
광야에서 예수님은 외로우십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겪으실 고독을 앞서 체험하십니다.
당신을 따랐던 그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도 떠나고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세 제자도 쿨쿨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당신 곁에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괴롭다 해도 아무도 당신 마음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외로움은 누가 옆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있다 해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의 십자가 고통 앞에서 너무도 고독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혼자 져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어머니도 이 십자가는 대신 질 수 없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절대 고독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 되고
이 절대 고독이 기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광야의 고독 가운데서
하느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광야의 고독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해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어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알 듯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합니다.
이런 면에서 집안에서는 가장이 가장 고독하고,
직장에서는 최고 경영자가 가장 고독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장상이 가장 고독하고,
더 올라가면 하느님께서 가장 고독하십니다.
제가 관구장을 할 때입니다.
형제들은 힘들다는 하소연을 저에게 쏟아놓습니다.
형제들은 불만도 저에게 다 쏟아놓습니다.
저희 수도회 여러 문제들을 저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해결책을 내 놓으라 합니다.
저 또한 같은 인간이고
그래서 힘들고 하소연하고 싶고 불만을 터뜨릴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형제들은 이런 저에게 온갖 것을 쏟아 붓고
저는 달리 터뜨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 때
누구 의지할 데를 찾기보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쓰레기를 쓰레기통이 받아들이는 덕분에 방이 깨끗하지요.
만일 쓰레기통이 쓰레기 받아들이기를 싫다하면
온 방이 지저분하겠지요.
‘그래 내가 형제들의 쓰레기통이 되어 주자!’
‘그리고 가장 큰 쓰레기통인 하느님께 쏟아버리자!’
‘나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찾아가 하소연하지 않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한탄하지 않고 하느님께 한탄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힘을 얻지 않고 하느님께 힘을 얻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사순절 우리의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 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느끼셨던 고독은
우리에게 교훈적입니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그러시나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겠지?”
두 번째로 광야에서 예수님은 배고프십니다.
광야에는 돌덩이밖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여 사탄이 다가와 예수님께 유혹을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우리는 이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안심도 하게 됩니다.
유혹을 받으시기까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심에 감사드리고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시니 수없이 유혹받는 우리도
유혹 자체가 죄가 아님에 안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고 감사만 드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유혹의 본질을 깨닫고
유혹을 통하여 하느님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유혹은 배고픈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배부른 사람은 식욕이 없고
식욕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는 법이지요.
이것은 비단 먹는 것 뿐 아닙니다.
없을 때 소유욕이 생기고 소유욕이 있을 때 유혹을 받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자가 하는 짓은
뱀이 하와에게 부족한 것, 없는 것을 일깨우듯
없는 것을 일깨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고 가지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돌을 내밀며
당신은 빵은 없고 돌밖에 없으니
당신의 능력으로 빵을 만들어 식욕을 채우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빵은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유혹자가 많습니다.
명품을 걸치고 와서 내게 명품이 없음을 일깨우고
소유욕을 부추기며 유혹합니다.
갖가지 없음을 일깨우고 욕심을 부추기며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도 배고프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뱀이 가지지 못한 것 하나를 일깨우니 못 가진 것만 보고
가진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못 가져서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못보고 못 누리기에 불쌍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욕심내는 것을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배고프고 궁핍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에 대한 욕구를 단식을 통하여
말씀에 대한 욕구로 바꾸십니다.
아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빵에 대한 욕구를 잠재웁니다.
우리도 사순절 단식으로 우리의 온갖 욕구를 영적인 갈망으로 바꾸고
하느님 말씀, 즉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께서는
광야를 나와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단식으로 복음을 소유한 행복을 당신 혼자 소유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그 복음, 그 행복을 나누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나도 행복하니,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김 추기경의 말씀과 같습니다.
나누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줄 수 없는 법이지요.
같은 이치로 행복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나누지 못할 것이고
나눌 마음이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기 혼자 행복한 것을 미안해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주고도 나누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행복한 우리는
기도와 단식으로 우리 시대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불행한 사람에게
우리의 행복을 나누어야 하고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자선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가진것 없어보이는 허름한 아저씨는
더 허름한 할머니에게 몇년 동안 꼭 100 원을 주고 가시며
자기가 손수 싸온 도시락을 노숙자에게 땅에서 먹게배려하고
1000 원짜리 몇장으로 슈퍼에서 빵을 사서 땅바닥에 누워있는
노숙자를 흔들어서 빵을 먹게 해주는 모습을 보고는
나는 부끄러웠고 가슴이 뭉클 했다.
그 아저씨는 노출하지않으려고 모자 눌려쓰고, 마스크를 하고는
돈을 벌어야 빵을 살수 있다고 돈 벌러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시는
그 아저씨는 우리 모두에게 가진것없어도
더 가난한 이웃에게 줄수있다는것을 이번 사순기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을 회개 시켜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