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식사기도(1660)
작 가 : 쟌 스텐(Jan Steen : 1626-1679)
크 기 : 캠퍼스 유채 46 X 57.5 cm
소재지 : 영국 레스터셔 비버 성(Belvoir Castle)
네덜란드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많은 지역이 개신교인 칼빈 파로 넘어가면서 개신교 전통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개신교는 시작점에서 “오직 성서만으로” 라는 신조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가톨릭교회가 지향했던 성 미술의 많은 부분에 있어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만들었다.
가톨릭교회가 중요하게 표현하는 예수님이나 성모님에 대한 표현, 성인들의 생애, 특히 기적에 대한 표현은 그들의 사고방식대로 비성서적인 것이거나 더 나아가 우상숭배로 치부하는 거부와 함께 자기대로의 새로운 성 미술의 방향을 마련하게 되었다.
여기에 일조를 하게 된 것이 바로 칼빈이 가르친 “신의 예정설” 교리였다. 칼빈은 신의 예정설로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점지하는 것이란 것을 가르치면서 실재 삶에서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삶을 강조했기에 세상 삶이 천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가르치면서 천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현세는 잠시 지나가는 환승 점처럼 강조하다 보니 현실 삶에 소홀히 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현실 삶에서 승리와 이익 축적이 바로 하느님이 약속한 구원의 표징으로 가르쳤기에 천상적 삶의 지향하던 가톨릭 신자들과 달리 현실 삶에서 성공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이익 추구에 몰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오늘 이 땅에서 가히 천문학 수준의 많은 신도들을 모우고 있는 대형 개신교들의 성공 신학은 바로 이런 칼빈 신학의 영향을 좀 저질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토의 많은 부분이 해면보다 낮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진취적인 생활 태도가 몸에 베인데다 칼빈의 신학에 의해 세상에서의 성공이 천국 입성의 여권과 같다는 신앙태도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돈을 모우는 것을 삶의 지혜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이런 생활 태도는 기대 이상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 결과로 작가 당시의 네덜란드 사회는 유럽 어느 국가와도 비길 수 없는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떤 이들은 진귀하고 값진 물건을 모으는 것으로 부를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좀 어려운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정물화나 풍속화를 집안에 비치히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해서 당시 네덜란드의 가정들은 유럽 어느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정물화나 풍경화 한 장을 집에 두는 것이 필수처럼 정착하게 되었다.
작가는 네덜란드 사회가 이렇게 물질적인 풍요를 구가하던 때 작품 활동을 하면서 풍속화를 통해 신앙적인 가치를 권고하는 역할을 하면서 가톨릭교회와 전혀 다른 성 미술의 분야를 개척했다.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 드러나는 표현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제시함으로서 작가는 종교가 어떤 형식의 준수나 율법적인 차원이 아닌 참으로 일상 삶의 현장에서 인간미 풍기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는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가족들이 만나는 아침 식탁처럼 정겨운 것이 되었다.
작가는 식사 기도라는 주제를 여러 번 계속 다룸으로서 너무도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식사를 통해 드러나는 크리스챤 신앙의 향기로운 면을 제시함으로서 신앙의 실천화에 기여했다.
개신교적인 시선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그동안 가톨릭적인 신앙 표현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점을 제시하는 천상 세계가 목표가 됨으로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현세 삶에서 신앙 실천의 가치성을 전달하는 좋은 계기가 되게 만들었다.
어느 가정의 아침 식사 장면이다. 실내의 분위기가 유복한 것으로 보아 당신 무역으로 부유한 처지에 있던 화란의 중류 가정이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식탁에 음식이 차려지고 모두 식사를 하려는 순간 주부가 어린 딸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다. 이 주부의 태도로 식사가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 주부는 막내인 듯한 어린 소녀에게 식사기도를 했는지 다그치고 있다.
식탁에서의 가르치는 것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치는 진지한 모습이고 어린 딸 역시 어머니의 요청을 정신을 차려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이 주부는 자녀 교육에 있어 식탁에서 치러야 할 예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임을 강조하는 모습이다.
맞은편에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내의 잔소리가 끝나길 바라는 듯 접시를 손에 쥐고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가장에게는 아내가 하는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빨리 식사를 했으면 하는 일념으로 식탁을 내려 보고 있다.
그 아래에 이 가정에 키우는 애완견 한 마리가 식사 준비를 위해 무릎에 천을 깔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이 던져주는 고기 한 점이라도 먹기 위해 더 없이 정다운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을 바라보는 개의 시선은 더 없는 충실성의 상징이며 식사를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 감사 기도를 바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전의 손만 쳐다보는 종의 눈처럼 마님의 손만 쳐다보는 몸종의 눈처럼 우리 하느님 야훼의 자비를 바라 우리 눈이 그분을 쳐다봅니다.” (시편 123장 2절)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면 식사기도는 크리스챤이라면 하느님께 대한 감사 표현의 최고 기도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에 주인을 바라보는 이 개의 표정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태도와 같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어머니가 자기 어린 딸에게 식사 기도를 가르치는 것은 딸이 걸어야 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에 이처럼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있다.
자녀교육, 신앙 교육은 어느 종교이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첫영성체 교육이나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이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로 이론적인 방법 신심 수업의 차원을 무게 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주부는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는 식사기도를 신앙 교육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 딸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오늘 많은 종교가 신심 활동과 실재 신앙인의 삶이 서로 유리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서 참으로 새겨 보아야 할 중요한 태도이다.
성서는 오늘도 우리 교회가 강조하는 여러 교리 수업 못지않게 인간 삶의 기본인 식탁 예법과 하지 않거나 건성으로 하기 쉬운 식사 기도의 중요성, 특히 이것이 자녀 교육에 있어 어머니에게 맡겨진 중요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예의 바르게 식사를 먼저 끝내고 탐식하여 실례를 범하지 마라.” (집회 31,17)
“자녀가 있느냐? 그들을 훈육하고 어릴 때부터 그들이 목을 숙이게 하여라.”(집회 7,23)
“그는 자녀들을 지혜의 보호 아래 두고 지혜의 나뭇가지 밑에 자리를 잡는다.”(집회 14, 26)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집회 3,2)
“그리하여 주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지혜 16, 26)
교회는 이 성서 말씀을 심화해서 계속 전달 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최후만찬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제자들과 가졌던 마지막 식사를 교회는 기억하는 것이 바로 성찬례이며 쉽게 말해서 크리스챤들은 예수님과의 식사를 나누는 것이 신앙의 핵심임을 알리고 있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 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요한 14: 16, 마르 14:17-18)
주님의 최후만찬에 대한 기억은 크리스챤들에게 너무 소중한 것이기에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위시해서 많은 가톨릭 작가들이 이 주제로 역사에 남을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네덜란드의 작가들이 이런 정물화 형식이나 풍속화 형식을 통해 신앙 실천에 중요한 것을 강조한 것처럼 이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도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즈(Diego Rodríguez Velázquez)가 일상에서 너무 쉽게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을 통해 성서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보데곤( Bodegon)이라는 화풍을 시작했으나 이 작품의 작가는 이 분야에서 풍요로운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내용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식사를 신앙과 예술의 연결고리로 만든 것은 크리스챤 예술의 특수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음식 문화가 대단히 발달된 중국이나 터키에서도 식탁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풍요의 과시는 될 수 있었으나 식사 풍경을 통해 신앙의 표현한 예는 거의 없었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크리스챤 예술의 삶의 모든 부분과 너무도 직결되는 것, 신앙의 중요한 차원은 일상의 삶에서 신앙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렸다는 면에서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종교가 다 그렇든 교리의 강조나 법적인 관점의 강조는 신앙을 위선과 형식으로 가득 찬 박제품으로 여기게 만들며 오늘 여러 종교의 퇴락 현상 중에 중요한 것도 바로 종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법이나 교리 해설 관점으로 흐른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꼭 누구를 도운다거나 봉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삶에서 신앙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신앙이 교양과 직결되면서 많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가 신심생활이나 나눔의 생활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에 의해 사각지대로 남게 된 것이 바로 교양 차원이라 볼 수 있다.
뭘 시작한다하면 준비 단계로 묵주 기도 백 만단은 기본이고 또 도움이 필요한데가 있다면 주머니를 푸는 것도 과거보다 훨씬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신앙을 표현을 평범한 삶 안에서 교양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선 아직 가톨릭 신자이기에 다른 종교인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 보다 더 나은 데가 없다는 것이 오늘의 서글픈 현실이기도 하다.
이 면에서 이 작품의 주부가 딸에게 식사기도를 가르치는 모습은 신앙을 교양으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 참으로 힘쓰고 노력해야 할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