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폭풍속의 예수님(2019)
작 가 : 민지현 (사라)
크 기 : 혼합재료 : 112X42cm
소재지 : 개인 소장
오늘 우리 교회의 밝은 면 중 하나는 성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여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이라면 신앙의 연조가 낮은 탓에 성미술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런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토착화 차원을 강조한다는 것이 한복에다 비녀를 찌른 머리의 성모상이 되면 좀 어색하고 다른 성미술의 표현 역시 서양 중세기 성화에서 볼 수 있는 상징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서 신앙의 현주소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 성미술의 현주소를 찾기 어려운 작품들이 제작되는 것도 사실이나 이것은 연륜이 해결할 수 있고 또 작가들도 노력하고 있으며 성미술 협회에선 성미술에 관한 교황청 문헌을 번역해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작가는 가톨릭 신자로서 성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오랜 기간 동안 나름대로의 정상적인 연구와 시도를 해왔다.
먼저 성서를 공부하면서 성미술의 바탕인 성서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키웠고 교회 역사와 성미술의 변천 과정을 공부하면서 작가 나름대로 현대에 필요한 성미술의 방향 제시에 노력해왔다.
이런 삶의 태도로서 작가는 인고의 노력이 깃든 작품 전시회를 열었으며 지난 5월에도 몇 년 모운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했다.
작가는 항상 전시회 때마다 주제별이나 혹은 작가가 생각하는 특정 방향으로 작품을 준비하는데 이번은 푸른색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제작해서 작품의 방향 제시를 명확히 하고 있는데 이번 주제는 푸른색을 주조로 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푸른색을 유난히 좋아하는 작가는 이번 작품전 전체의 기조 색깔을 푸른색으로 했으며 이 작품은 그중에 하나이다.
이 작품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내용의 시각화이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태 8장 24-27절)
칠흑 같은 밤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룻배로 갈릴레아 호수를 지나가고 있다. 하늘도 바다도 칠흑 같은 푸른색이 감도는 밤이다.
제자들은 튼실하지 못한 배로 호수를 항해하는데 마음의 부담을 느껴 모두 뜬눈으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으나 예수님만은 낮의 선교 활동에 너무 피곤한 탓인지 천하태평으로 주무시고 계신다.
제자들은 하나 같이 불안에 휘말려 어떤 이는 하늘을 향해 외치기고 하고 어떤 이는 호수 물에 손을 담그기도 하며, 다른 제자들은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낙엽처럼 흔들리는 배에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조그만 배는 혼란한 세상의 축소판이다. 그런데 하나 다른 것은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이 한배를 타고 주무시는 주님이 계신 것을 확인한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제자들의 성화에 의해 잠을 깬 주님께서는 이들이 불안해하시는 모습을 보시고 위로하시기는커녕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바다를 호령하시자 잠잠해지면서 제자들은 불안에서 해방되고 스승과 함께 하는 배에서 스승을 바라보지 못하고 폭풍에 정신이 빠진 자기들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하고 이 반성을 통해 자기들의 믿음을 성장시켰다는 내용이다.
세상 모든 일을 손바닥처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현대이다.
조석으로 실어 나르는 뉴스를 보며 느낄 수 있는 것은 항상 위기의식을 포함한 불안정성이다.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고나 재앙이 온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매일 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불안의식이 증대하면서 사회 여러 분야에서 기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지진을 감지하듯 앞으로 닥칠 위험이나 위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불안의 가상공간을 만들어 불안을 피하기 위한 불안감을 즐기고 있다.
헐리우드에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서 만든 많은 영화들은 불안을 피하기 위해 불안을 즐기게 만드는 역설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폭풍 사화에서 우리는 현대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제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는 사이 스승 예수님은 주무시다가 다급히 깨우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는데, 믿음이란 우리 삶의 현장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특히 위기의 순간에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신앙이 깊다는 것은 성서의 내용을 통독하는 것도 교회 활동의 실적이나 평가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일상 삶의 현장, 특히 어려움을 느끼는 그 순간 당황하거나 불안하지 말고 폭풍우 속에서 주무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제자들처럼 불안할 때라도 자기 주위에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위로를 얻거나 아니면 더 급하면 주님께 다가가 도와 달라고 그분을 깨우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려운 순간에 즉시 다가오시지 않고 침묵하거나 주무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주님이 가까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또 어떤 때 주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함께 하심을 믿는 튼실한 마음을 키우는 것이다.
현대는 예기치 못한 사고 재앙의 메시지가 쉼 없이 쏟아지고 있다. 뉴스라고 듣는 게 희망의 소식이 아니라 재앙의 예고편처럼 여겨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주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타고 있던 거룻배는 현대인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의 상징과 같다.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이것을 예방하거나 극복하려고 노력해봐야 여기에는 항상 한계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절실히 다가오는 적이 없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삶은 주님을 모시고 항해라는 삶이 라는 것이다. 크리스챤이라고 여느 인간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유혹에서 면제된 사람은 아니다.
다만 크리스챤은 어려움과 위기의 순간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살아가고 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오면 지체 없이 주님께 달려가 주무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 분을 깨우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론적 잣대로 접근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현실적 삶과 무관한 어떤 공상의 세계에서 즐기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즉시 좌절하거나 신앙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신앙과 생활이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서로 별도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제자들의 삶은 너무 인간적이고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드는 신앙인의 모델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강하고 완벽한 신자가 되길 노력하기보다 어설픈 것처럼 살면서도 항상 주님께서 내 인생 여정에 함께 하심을 믿고 급한 순간에 그분께 매달릴 수 있는 단순하고 순박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흔들리는 뱃속에서 주님이 계심을 믿었기에 의연한 제자들이 아니라 그분을 흔들어 깨우는 믿음 약한 이 제자들이야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 크리스챤의 모델임을 제시한다.
믿음이란 어떤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약한 인간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매달리는 행위를 말한다.
복음에서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고 꾸지람 들을 수 있는, 때론 급할 때면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울 수도 있는 이 제자들이야 말로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의 참 제자의 모습이다.
“주께 의지하는 이 시온산 같으니,
흔들림이 없어라 항상 꿋꿋하여라
산들이 예루살렘을 에우고 있듯이
주께서 그 백성을 늘 감싸 주시도다.“ (시편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