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와 그 대장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여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베드로를 데리고 대사제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에 문지기 하녀와
불을 쬐던 사람들과 말코스의 친척인 대사제의 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하자
베드로가 “나는 아니오.”하고 말하였다."(요한8,15-27)
저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 당신이 붙잡혀간 한나스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당신이 믿었던 제자였지요.
얼마나 믿으셨으면 그에게 천국문의 열쇠를 맡기고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당신이 가시는 곳까지는 저희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처럼 호기 있게 나서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하였지요.
그런 그를 어떻게 밖에 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는 사이임을 이용하여
베드로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 더 잘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습니다.
칼을 휘둘렀으니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문지기 하녀가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제자임을 부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엉겁결에 부인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도 다시 아니라고 부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봤을 때 도망쳐나갔을 수도 있었는데
베드로는 계속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었나 봅니다.
적극적으로 제자임을 밝히지도 못하고
완전히 배신하고 떠나지도 못했던 것이겠지요.
사실 자식이 부모를 부정한다고 부모가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제자가 스승을 부정한다고 스승이 스승이 아니고,
제자가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자기의 중요한 정체성을 상실할 뿐이고
사랑을 잃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도 처음부터 악마로 만들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도 사랑을 끝까지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자녀와 제자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사람이 악마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자녀관계, 제자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하느님 사랑을 받지 못할 뿐입니다.
당신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수없이 다가가셨지요.
그때 악령들은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간섭하십니까?”하며
당신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사랑을 간섭이라고 여겼습니다.
베드로도 전에 주님, 당신이 수난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럴 수 없다고 하다가 사탄이라는 질책을 이미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수난의 길을 당신과 함께 가기를 거부함으로써
관계마저 거부하는 악마가 되었습니다.
사실 더러운 영들은 자기들이 주님이 누구신지 잘 안다고,
당신이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안다고 아는 체를 하곤 하였지요. 하느님을 잘 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악령들은 우리보다도 하느님을 더 잘 압니다.
그러니 아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으로 함께 함이 중요하지요.
<성주간 화요일>
저의 필명인 당쇠는 마당쇠의 준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맡은 배역이 흥부놀부전의 마당쇠였습니다.
저는 마당쇠 역에 불만이었지만
선생님이 시키시니 어쩔 수 없이 하였습니다.
이 역을 맡은 것이 어렸을 때는 불만스러웠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야훼의 종으로 살라는 섭리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런 저의 신원을 상기시키기 위해
마당 쓰는 청소구역을 스스로 맡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제가 하는 대사는 딱 한 마디였습니다.
“예”입니다.
주인인 놀부가 부르면 “예”하고 달려가고
주인인 놀부가 시키면 “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종은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무는 자이고,
그러다 주인이 시키면 무엇이든 실행하는 자입니다.
오늘 독서는 야훼의 종의 두 번째 노래입니다.
주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부르시고,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고 야훼의 종은 노래합니다.
그러니 야훼의 종으로서의 성소는 모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생겨라! 말씀하시자 “예”하고 그대로 생겨난 존재이고
그 때 이후로 늘 주님 곁에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 손 그늘에 늘 머무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야훼의 종의 첫 번째 성소입니다.
야훼의 종의 두 번째 성소는 명령의 수행입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여 생겨난 존재이기에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운명입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예”하고 즉시 수행하고
그리고 기꺼이 수행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왜”라는 말은 없고 “예”라는 말만 있습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라고 소명을 주시면
“예”라고 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이 소명을 위해 죽어라 하시면,
그때도 “예”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게 되어도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왜”가 없고 “예”만 있으니 평화롭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평화롭고
민족들과 나 사이에 평화롭고
무엇보다도 나와 나 사이에 평화롭습니다.
민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구원의 소명을 다 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내가 대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베드로를 데리고 대사제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에 문지기 하녀와
불을 쬐던 사람들과 말코스의 친척인 대사제의 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하자
베드로가 “나는 아니오.”하고 말하였다."(요한8,15-27)
저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 당신이 붙잡혀간 한나스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당신이 믿었던 제자였지요.
얼마나 믿으셨으면 그에게 천국문의 열쇠를 맡기고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당신이 가시는 곳까지는 저희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처럼 호기 있게 나서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하였지요.
그런 그를 어떻게 밖에 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는 사이임을 이용하여
베드로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 더 잘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습니다.
칼을 휘둘렀으니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문지기 하녀가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제자임을 부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엉겁결에 부인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도 다시 아니라고 부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봤을 때 도망쳐나갔을 수도 있었는데
베드로는 계속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었나 봅니다.
적극적으로 제자임을 밝히지도 못하고
완전히 배신하고 떠나지도 못했던 것이겠지요.
사실 자식이 부모를 부정한다고 부모가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제자가 스승을 부정한다고 스승이 스승이 아니고,
제자가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자기의 중요한 정체성을 상실할 뿐이고
사랑을 잃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도 처음부터 악마로 만들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도 사랑을 끝까지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자녀와 제자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사람이 악마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자녀관계, 제자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하느님 사랑을 받지 못할 뿐입니다.
당신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수없이 다가가셨지요.
그때 악령들은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간섭하십니까?”하며
당신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사랑을 간섭이라고 여겼습니다.
베드로도 전에 주님, 당신이 수난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럴 수 없다고 하다가 사탄이라는 질책을 이미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수난의 길을 당신과 함께 가기를 거부함으로써
관계마저 거부하는 악마가 되었습니다.
사실 더러운 영들은 자기들이 주님이 누구신지 잘 안다고,
당신이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안다고 아는 체를 하곤 하였지요. 하느님을 잘 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악령들은 우리보다도 하느님을 더 잘 압니다.
그러니 아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으로 함께 함이 중요하지요.
<성주간 화요일>
저의 필명인 당쇠는 마당쇠의 준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맡은 배역이 흥부놀부전의 마당쇠였습니다.
저는 마당쇠 역에 불만이었지만
선생님이 시키시니 어쩔 수 없이 하였습니다.
이 역을 맡은 것이 어렸을 때는 불만스러웠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야훼의 종으로 살라는 섭리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런 저의 신원을 상기시키기 위해
마당 쓰는 청소구역을 스스로 맡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제가 하는 대사는 딱 한 마디였습니다.
“예”입니다.
주인인 놀부가 부르면 “예”하고 달려가고
주인인 놀부가 시키면 “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종은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무는 자이고,
그러다 주인이 시키면 무엇이든 실행하는 자입니다.
오늘 독서는 야훼의 종의 두 번째 노래입니다.
주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부르시고,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고 야훼의 종은 노래합니다.
그러니 야훼의 종으로서의 성소는 모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생겨라! 말씀하시자 “예”하고 그대로 생겨난 존재이고
그 때 이후로 늘 주님 곁에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 손 그늘에 늘 머무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야훼의 종의 첫 번째 성소입니다.
야훼의 종의 두 번째 성소는 명령의 수행입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여 생겨난 존재이기에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운명입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예”하고 즉시 수행하고
그리고 기꺼이 수행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왜”라는 말은 없고 “예”라는 말만 있습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라고 소명을 주시면
“예”라고 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이 소명을 위해 죽어라 하시면,
그때도 “예”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게 되어도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왜”가 없고 “예”만 있으니 평화롭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평화롭고
민족들과 나 사이에 평화롭고
무엇보다도 나와 나 사이에 평화롭습니다.
민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구원의 소명을 다 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내가 대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원하고 행복한 마당쇠가 될것입니다.
"왜"라는 말은 없고 "예"라는 말만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늘 묵상글로 정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나와 나 사이에 평화를 화두로 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