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영은 생명을 준다”)
기원후 5세기에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뺄라지우스의 구원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이 논쟁의 초점은 “인간의 구원이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혹은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문제에서 야기되는 의문들을 해결키 위해 중세에 소위 ‘재배치(dispositio)’라는 학설이 생겨났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과하지 않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고유한 선물이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중세부터 교회는 가르쳐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들 안에는 여전히 이러한 이분법적인 해석에서 기인하는 얀세니즘적인 태도로 인해 죄의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구속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소위 이러한 중세기적 패러다임에 이끌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자신을 구속하면서 상대방 또한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나 또한 그러하기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은 생명을 준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성령을 만나는 것이고, 성령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숨’과도 같은 ‘생명의 기운’이며, ‘바람’과 같이 만질 수 없고, 어디서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자유 그 자체’이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바라보며 그분을 느낄 때, 그 자유는 우리를 완전한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완전한 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유 또한 성령의 움직임과 같아서 우리를 방향성 없는 인간으로 존재지우고 있다. 곧 알 수 없는 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인, 아무리 하느님을 느끼려 해도 체험할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느님, 그 알 수 없고 텅 빈 공허함, 무한히 열려진 상태, “있음 그 자체”이신 분을 바라보자.
그 자리에 앉아 차(茶) 한잔 기울여보자.
기원후 5세기에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뺄라지우스의 구원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이 논쟁의 초점은 “인간의 구원이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혹은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문제에서 야기되는 의문들을 해결키 위해 중세에 소위 ‘재배치(dispositio)’라는 학설이 생겨났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과하지 않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고유한 선물이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중세부터 교회는 가르쳐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들 안에는 여전히 이러한 이분법적인 해석에서 기인하는 얀세니즘적인 태도로 인해 죄의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구속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소위 이러한 중세기적 패러다임에 이끌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자신을 구속하면서 상대방 또한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나 또한 그러하기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은 생명을 준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성령을 만나는 것이고, 성령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숨’과도 같은 ‘생명의 기운’이며, ‘바람’과 같이 만질 수 없고, 어디서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자유 그 자체’이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바라보며 그분을 느낄 때, 그 자유는 우리를 완전한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완전한 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유 또한 성령의 움직임과 같아서 우리를 방향성 없는 인간으로 존재지우고 있다. 곧 알 수 없는 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인, 아무리 하느님을 느끼려 해도 체험할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느님, 그 알 수 없고 텅 빈 공허함, 무한히 열려진 상태, “있음 그 자체”이신 분을 바라보자.
그 자리에 앉아 차(茶) 한잔 기울여보자.
그 자리에 앉아 차(茶) 한잔 기울여보자.-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