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 말씀에서 목자와 양 사이의 깊은 관계가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 둘 만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슨 일의 내용은 경우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깊은 관계를 대변해 주는 것은 항상 ‘감사’입니다.
“안다”다는 말은 강한 체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이란 강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였고 이런 앎은 신앙을 형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해방과 구원되는 체험이 없다면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는 말의
참뜻을 알 수 없다고 봅니다.
제2독서에서 성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듯이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는
그런 구원 체험에서 연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오로 성인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화답송은 이를 잘 알려줍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집 짓는 이들”이란 누구이겠습니까?
‘다수’일 수 있고 많이 ‘가진 자’일 수도 있고,
‘효율’일 수도 있고 ‘어떤 힘’일 수도 있습니다.
“내버린”이란
그들이 나를, 내 의견을, 내 입장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물어보지도 않고, 부당하게, 억울하게 당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런 모든 것을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권고 6)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이런 일을 당하면 논쟁하고 투쟁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날 줄 압니다. 아니 당할 줄 압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며 맡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 하소연 할 수 있습니다.
괴롭다. 억울하다. 도와달라.
그러나 힘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힘이란 무엇입니까?
험담, 비난, 판단, 술책, 사람에게 의지, 제후들을 믿음 등
그러면 이러고 마는 것인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체험을 합니다.
제2독서에 말씀을 빌리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분의 도와주시는 손길을 느낄 때
우리는 아주 명확하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이 명확해집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우리가 그분을 아는 것은 감사에서 드러납니다.
성녀 글라라가 유언 서두에서
이런 감사의 마음을 무엇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우리가 받았고
또한 매일같이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은혜 중에 가장 큰 것은
우리들의 성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스로우신 그분께 더욱더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 부르심이 보다 완전하고 큰 것인 만큼
그에 따라 우리는 그분께 더욱더 고마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그대가 받은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성녀가 말년에 이렇게 감사로 유언을 시작하는 것은
그녀의 삶에 굴곡이 많았고
그런 가운데서 주님께서 기묘하게 도와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를 하느님을 관상하는 여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그녀의 그런 어려움들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도록”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분처럼” 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관상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보는 것이 되는 것이고
성녀를 관상하는 여인을 넘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제2독서는 이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분을 뵙게 되는 것 때문에
우리도 그분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어려움을 통해 우리는 관상을 하게 되고
이런 관상은 우리도 그분처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바라보는 사람을 넘어
바라보는 사람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불리움 받은 성소입니다.
물론 사제, 수도자로서의 성소가 예외적이고 특별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가 되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길이
누구나 예외 없이 일상에서 겪는 일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수도회는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할 수 있고,
어디에 있고, 어디도 가고, ….
그러나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들은 것을
아주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다음의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게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주의 깊게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 말씀에서 목자와 양 사이의 깊은 관계가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 둘 만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슨 일의 내용은 경우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깊은 관계를 대변해 주는 것은 항상 ‘감사’입니다.
“안다”다는 말은 강한 체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이란 강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였고 이런 앎은 신앙을 형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해방과 구원되는 체험이 없다면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는 말의
참뜻을 알 수 없다고 봅니다.
제2독서에서 성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듯이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는
그런 구원 체험에서 연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오로 성인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화답송은 이를 잘 알려줍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집 짓는 이들”이란 누구이겠습니까?
‘다수’일 수 있고 많이 ‘가진 자’일 수도 있고,
‘효율’일 수도 있고 ‘어떤 힘’일 수도 있습니다.
“내버린”이란
그들이 나를, 내 의견을, 내 입장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물어보지도 않고, 부당하게, 억울하게 당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런 모든 것을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권고 6)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이런 일을 당하면 논쟁하고 투쟁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날 줄 압니다. 아니 당할 줄 압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며 맡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 하소연 할 수 있습니다.
괴롭다. 억울하다. 도와달라.
그러나 힘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힘이란 무엇입니까?
험담, 비난, 판단, 술책, 사람에게 의지, 제후들을 믿음 등
그러면 이러고 마는 것인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체험을 합니다.
제2독서에 말씀을 빌리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분의 도와주시는 손길을 느낄 때
우리는 아주 명확하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이 명확해집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우리가 그분을 아는 것은 감사에서 드러납니다.
성녀 글라라가 유언 서두에서
이런 감사의 마음을 무엇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우리가 받았고
또한 매일같이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은혜 중에 가장 큰 것은
우리들의 성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스로우신 그분께 더욱더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 부르심이 보다 완전하고 큰 것인 만큼
그에 따라 우리는 그분께 더욱더 고마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그대가 받은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성녀가 말년에 이렇게 감사로 유언을 시작하는 것은
그녀의 삶에 굴곡이 많았고
그런 가운데서 주님께서 기묘하게 도와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를 하느님을 관상하는 여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그녀의 그런 어려움들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도록”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분처럼” 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관상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보는 것이 되는 것이고
성녀를 관상하는 여인을 넘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제2독서는 이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분을 뵙게 되는 것 때문에
우리도 그분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어려움을 통해 우리는 관상을 하게 되고
이런 관상은 우리도 그분처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바라보는 사람을 넘어
바라보는 사람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불리움 받은 성소입니다.
물론 사제, 수도자로서의 성소가 예외적이고 특별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가 되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길이
누구나 예외 없이 일상에서 겪는 일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수도회는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할 수 있고,
어디에 있고, 어디도 가고, ….
그러나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들은 것을
아주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다음의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게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주의 깊게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