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가족 중의 하나가 자살한 집의 모든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ㅇㅇ 자매는 이제 하느님 자비에 맡기십시오.
지옥에 갔을 거라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마지막 순간까지 ㅇㅇ 자매가
어떻게 회개하고 갔는지 누구도 모를 뿐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이 정신 질환으로 목숨을 끊은 ㅇㅇ 자매님을
자비 없으신 분처럼 단죄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ㅇㅇ 자매가 지옥에 갔을 거라고 믿는다면
하느님 자비에 대한 모독이요 불신앙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ㅇㅇ 자매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 자비가 내 자비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으십시오."
우리는 종종 斷定을 잘 합니다.
그리고 그 단정은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단정은 교만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자기보다 더 죄인인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겸손한 사람은
감히 남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을 단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쁘게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영역에 대해서는 더더욱 단정 짓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하느님인 양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긍정적으로 내리면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그의 모든 판단은 부정적입니다.
남을 깎아내려야 자기가 우뚝 서고
남이 죄인이어야 자기는 거룩하며
남이 나빠야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단정은 곤란합니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꼭 제도 그리스도교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 형식으로 세례를 받아야지만 믿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이것은 지나친 단정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일정한 곳에서 행해지는 일정한 형식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과 같이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지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70 장로가 아닌데도 그리고 만남의 장막 밖인데도
엘닷과 메닷은 주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모세는 자기를 위해 질투하는 것이냐고 반문한 다음
차라리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좋게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가족 중의 하나가 자살한 집의 모든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ㅇㅇ 자매는 이제 하느님 자비에 맡기십시오.
지옥에 갔을 거라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마지막 순간까지 ㅇㅇ 자매가
어떻게 회개하고 갔는지 누구도 모를 뿐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이 정신 질환으로 목숨을 끊은 ㅇㅇ 자매님을
자비 없으신 분처럼 단죄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ㅇㅇ 자매가 지옥에 갔을 거라고 믿는다면
하느님 자비에 대한 모독이요 불신앙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ㅇㅇ 자매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 자비가 내 자비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으십시오."
우리는 종종 斷定을 잘 합니다.
그리고 그 단정은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단정은 교만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자기보다 더 죄인인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겸손한 사람은
감히 남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을 단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쁘게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영역에 대해서는 더더욱 단정 짓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하느님인 양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긍정적으로 내리면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그의 모든 판단은 부정적입니다.
남을 깎아내려야 자기가 우뚝 서고
남이 죄인이어야 자기는 거룩하며
남이 나빠야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단정은 곤란합니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꼭 제도 그리스도교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 형식으로 세례를 받아야지만 믿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이것은 지나친 단정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일정한 곳에서 행해지는 일정한 형식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과 같이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지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70 장로가 아닌데도 그리고 만남의 장막 밖인데도
엘닷과 메닷은 주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모세는 자기를 위해 질투하는 것이냐고 반문한 다음
차라리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좋게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 같을 지라도 결코 지옥과 천국이라는
유치한 방법으로 심판하시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아마도 종말에 심판이 있다면 그건 각자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자신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
즉 사필귀정한다는 차원에서의 지옥과 천국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을 그래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지
누구의 비난이 두려운 것은 아님을 체험적으로 깨닫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까닭에 하느님과의 화해는 먼저 내 자신과의 화해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겠지요.
인간의 자아실현이라는 차원에서
누군들 사람답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겠나 싶으면,
그렇지 못한 처지만큼 스스로 느끼는 괴로움이 크겠다 싶어
차라리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더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나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좋게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고맙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지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