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과 <목숨>의 관계를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자기 목숨>은 무엇이고 <목숨>은 무엇인지 아리아리합니다.
둘 다 내 목숨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둘 다 내 목숨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두 목숨의 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내가 있고 저런 내가 있다는 말인데
오늘 여기서는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하시니
주님을 따르려는 자기와 따르는 것을 거부하는 자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버린다는 것도 당연히
주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기를 버리는 거지요
자기를 버리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를 너무도 사랑하여 버리는 것과 미워하여 버리는 겁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육적인 자기를 버리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반면에 자기를 미워하여 자기를 버릴 수도 있습니다.
도공이 도기를 애써 만들고서는 자기 맘에 들지 않자 깨버리는 것과 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를 자해하거나 자살하는 경우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자기 버림은 당연히 사랑의 버림이지요.
주님을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집니다.
이 말은 제 십자가를 제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 포르치웉쿨라 청년 행진을 하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오늘로 이 행진을 마치는데 저희는 매일 주제를 갖고 걸었고
어제는 <성숙한 십자가 짐>을 주제로 걷고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매일의 나눔이 뜨거웠지만 어제의 나눔은 더욱 뜨거웠고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성숙함에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하느님을 알고 믿기 전에는 십자가가 고통일 뿐이었고
그래서 지기 힘들었는데 하느님을 알고 난 뒤에는
자기의 고통과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십자가 길에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질 수 있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알기 전에 우울증과 강박증 환자였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너무도 놀라운 거였지요.
우울증으로 자살할 수도 있었는데 하느님 사랑을 알고 난 이제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도 사랑하고
주님께 자신을 봉헌할 원의도 갖게 되었습니다.
미움 때문에 자기를 버리지 않고 사랑 때문에 자기를 버리며,
어쩔 수 없어 억지로 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사랑으로 제 십자가를 지는
주님의 참 추종자가 되기로 다짐하며 그 은총 주시기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길을 따라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
http://www.ofmkorea.org/92289
15년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내 십자가는 내가 져야!)
http://www.ofmkorea.org/80999
11년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살기 위해 죽는다.)
http://www.ofmkorea.org/5238
09년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누구 아닌 내가 져야 할 십자가)
http://www.ofmkorea.org/2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