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독서 로마서의 시작을 읽을 때 제게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기 전에 밤새도록 한 고백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이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가장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 없는 작은 종인 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이 고백이 생각났을까 생각해보니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며 하는 말이
예수는 누구이고 자신은 누구인지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즉시 반성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과 나의 차이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반성입니다.
이 두 성인은 인생의 막바지까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과
뚜렷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성찰과 인식이지요.
헌데 언제부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 질문과 성찰이 제게는 사라졌습니다.
왜 사라졌을까요?
10대, 20대 때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는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존재인지 몰랐고 또 그래서 알고 싶었으며
그래서 질문을 참으로 많이도 던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그 답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도 기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그때 이후 그리고 지금은 '답을 알았으니 됐다!' 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직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탐구가 끝나지 않고 계속 되고,
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어느 정도 됐다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고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치열하지 않은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기쁩니다.
두 성인처럼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을 다시 또 까먹을지라도.
사실 나라는 존재를 잘 알고 있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잘 알면서도 잘 모르는 것이 나이고,
하느님은 더더욱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느님이 신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신비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건 나에 대해서건 신비가 사라진
천박한 앎에의 안주를 뉘우치는 오늘이고,
그래서 새삼스럽게 입으로 읊조려 봅니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이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가장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 없는 작은 종인 저는 무엇입니까?"
(선이 없어 악한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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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표징을 요구하는 자와 표징이 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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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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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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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년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존재적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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