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것이다.
그러나 끝가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지금은 김대건 신부님이 사셨던 박해시대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여 불이익을 당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일이
없다고 해도 과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이 말씀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논리를 만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양심과 상반되는 주장을 만납니다.
이때, 그 반대되는 논리와 상반되는 주장에 타협하지 않고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할때 우리는 유형, 무형의 불이익과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논리에 맞서 예수님의 논리를 따라 살아갈 때
어떤 형태로든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게되는데,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사이의 충돌은 우리주위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예수님의 논리는 받아들임과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공존, 상생의 논리이고
세상의 논리는 편가름, 몰이해와 미움을 바탕으로 하는
파괴의 논리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조금만 눈여겨 본다면 이런 논리의 충돌을
우리는 자신안에서, 타인과 세상안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남아있습니다.
오늘하루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양심을 통해 알게된
예수님의 논리를 선택하여 살아감이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정신을 오늘 이시대에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끝가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지금은 김대건 신부님이 사셨던 박해시대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여 불이익을 당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일이
없다고 해도 과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이 말씀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논리를 만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양심과 상반되는 주장을 만납니다.
이때, 그 반대되는 논리와 상반되는 주장에 타협하지 않고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할때 우리는 유형, 무형의 불이익과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논리에 맞서 예수님의 논리를 따라 살아갈 때
어떤 형태로든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게되는데,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사이의 충돌은 우리주위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예수님의 논리는 받아들임과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공존, 상생의 논리이고
세상의 논리는 편가름, 몰이해와 미움을 바탕으로 하는
파괴의 논리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조금만 눈여겨 본다면 이런 논리의 충돌을
우리는 자신안에서, 타인과 세상안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남아있습니다.
오늘하루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양심을 통해 알게된
예수님의 논리를 선택하여 살아감이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정신을 오늘 이시대에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디에서 솟아오르는 지도 모를
용기가 생기는 것을 제 작은 일상에서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 거창한 것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저 사심을 버리니 용기가 생긴다는
제 작은 경험들을 잊지 않을 뿐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저와 함께 머무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저 세상이 전부 임을 기억하면서
순간 순간을 살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