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오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과 바리사이와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이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었고,
바리사이의 반응은 예수님의 기적을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라며
판단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상태에 있는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의 반응과 바리시이의 반응이 다릅니다.
그것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봅니다.
언제부터 말을못하고,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복음서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지 않지만,
말못하는 답답함과 사람들로부터 당했을 소외감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고통중에 있음이 확실합니다.
이때, 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 다가옵니다.
그 사람에게서는 자기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는 따뜻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어주고,
인자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손을 잡아줍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함이고 부드러움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일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뜨거워진 사랑의 마음이 마귀를 쫓아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갑작스러운 불행에 처한 이들을 만납니다.
이때 우리의 반응이 어떤 반응인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첫번째 반응이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일 것이고,
나의 첫번째 반응이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 판단하려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바리사이의 마음일 것입니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기적을 가져오고,
판단하는 마음은 또 다른 판단을 가져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과 바리사이와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이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었고,
바리사이의 반응은 예수님의 기적을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라며
판단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상태에 있는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의 반응과 바리시이의 반응이 다릅니다.
그것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봅니다.
언제부터 말을못하고,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복음서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지 않지만,
말못하는 답답함과 사람들로부터 당했을 소외감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고통중에 있음이 확실합니다.
이때, 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 다가옵니다.
그 사람에게서는 자기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는 따뜻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어주고,
인자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손을 잡아줍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함이고 부드러움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일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뜨거워진 사랑의 마음이 마귀를 쫓아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갑작스러운 불행에 처한 이들을 만납니다.
이때 우리의 반응이 어떤 반응인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첫번째 반응이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일 것이고,
나의 첫번째 반응이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 판단하려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바리사이의 마음일 것입니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기적을 가져오고,
판단하는 마음은 또 다른 판단을 가져옵니다.
또 어떤 때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고 싶지만,
차마 그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아 덮어두는 마음,
아마도 이런 ‘차마 그럴 수 없는 마음’을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마음으로 이해해도 되는지요.
‘왜, 그렇게 사느냐?’ 고 족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기적을 가져오고,
판단하는 마음은 또 다른 판단을 가져옵니다.“
라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판단의 지옥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
주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