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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는 해골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by 이종한요한 posted Nov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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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PNG


제   목 : 담배 피는 해골 (Skull with burning Cigarettes :1885)

   가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1853-1890)

   기 : 캠퍼스 유채 (32 X 24.5cm)

소재지 : 네덜란드 암스텔담 반 고흐 미술관


칼빈의 영향으로 개신교 국가가 된 화란은 바니타스(Vanitas) 라는 화풍을 정착시켰다. 죽음의 묵상을 주제로 한 화풍이 과거에도 없지 않았지만 개신교 전통에서는 가톨릭교회가 사용하던 예수님이나 성모님 성인들의 화상을 그들의 정서에 맞지 않기에, 자신들의 신앙 표현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개발한 것이 바로 바니타스이다.


세상에 있는 서로 상반되는 자료들 꽃과 보석류 같은 인생의 향락을 제시하는 것과, 해골이나 담배, 모래시계 등 인생의 덧없음으로 유도하는 것들의 조합으로 전도서의 사상을 전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이탈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임을 강하게 표현했다.


당시 네덜란드 사회는 식민지 개발과 무역의 발달로 부유해지면서 복음적 가난의 의미성이 퇴색되는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생기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신자들에게 재물에 대한 유혹이나 재물의 허망한 실상을 가르치기에 가장 좋은 것이 바로 바니타스이기에 이것은 당시 네덜란드 개신교 수준에서는 설득력 있는 신앙 교육의 한 장이 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초기 작품이며 자기의 일탈적인 처신에 실망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충격의 시간을 겪은 후의 작품이다.


네덜란드 사회에서 명망 있는 목회자로 평가받던 아버지는 자기 아들과 다른 복음적 표현이 몸에 벤 상태였다.


아들 고흐는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원하면서 그의 목회자 상은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극단의 헌신과 사랑에 매혹되어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그에게 아버지를 통해 드러나는 교회의 정서는 큰 장애로 다가왔다.


제도적인 교회는 말로서는 유창하게 복음을 외치지만, 실재에 있어선 현실적인 정서와 적당히 타협한 교회적 표현을 복음인양 강조하는 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다.


순수하고 우직한 작가에게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다가왔고 작가는 복음을 살기 위해  자식을 두고도 윤락의 길을 걸어야 하는 여자를 예수의 마음으로 받아 들여 아내로 삼고자 했을 때 드디어 제도적 교회의 모델인 아버지와 격렬한 충돌을 하게 되고, 그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작가는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사고방식에 동화되지 않고 제도적 교회를 떠나 복음을 바르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의 길을 통해 자기 신념에 맞는 예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했다.


반 고흐의 작품 전체가 신앙을 주제로 한 것이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어떤 전통적인 종교화 보다 더 힘차고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그의 특별한 신앙 체험에서 영글은 결실로 볼 수 있다.


반고흐.PNG


어떻게 보더라도 좀 생경스러운 해골의 모델이다. 해골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뼈를 두개골에 뭉쳐 만든 앙상한 인간 골격의 모습에 담배를 물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보더라도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해골과 연기를 내며 타고 있는 담배는 바니타스의 정확한 실상이다. 해골이 온갖 욕망과 쾌락의 말로 표현이라면 타고 있는 담배 연기는 무상한 인생의 상징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해골을 바로 자신의 자화상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가 그렇듯 작가 역시 줄담배의 흡연이 몸에 벤 사람이면서, 그 외에도 알콜에 의존도가 높은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바로 작가의 실재적 삶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자화상은 작가가 당시 유럽에 유입된 우기요에 라는 일본풍 그림에 매혹되면서 그린 자화상이며 얼굴을 일본 불교의 선승(禪僧)처럼 표현했다.


이 작품은 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동지 예술가로서 합류를 약속한 고갱을 기다릴 때이기에 극단의 희망의 순간에 남긴 작품이다.


바니타스가 삶과 죽음의 극한 상황의 묘사를 대비시키는 것 처럼 작가가 큰 희망의 순간에 그에게 닥칠 미래의 허망한 모습을 그린 것은 어떤 때 인생의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필연적인 인생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 1:2)


이런 허망한 인생의 실상을 충격적으로 제시하면서도 코헬렛의 저자는 결코 인간의 허망한 타령으로 인생을 끝내지는 않았다.


먼저 인생에는 다 거기에 걸맞은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코헬렛의 작가는 3장에서 4장 16절까지 인생의 순간에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때를 언급하면서 성공이나 실패, 행복이나 불행, 건강이나 질병, 출생이나 죽음 등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며 평정심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서 작가는 인생의 실상을 알기 위해선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는 것을 유심히 보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 보다 낫다. 거기에 인간의 모든 종말이 있으니 산 이는 이를 마음에 새길 일이다.”( 코헬 7:2)


작가가 자신의 현재에는 피부에 쌓여 보이지 않으나 미래에는 선명히 드러날 해골을 모델로 작품을 만든 것은 코헬렛 저자의 설명을 시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코헬렡 저자의 가르침을 너무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허무의 연속 같은 인생에서도 인생은 하느님의 안배아래 있기에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생은 허망하니 살아있을 때 진창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것과 다른 세련되고 멋스러운 즐거움을 전하고 있다.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코헬 9:9)


작가는 자기 아버지와 결별하면서도 복음을 순수하게 살고픈 열정으로 위선적인 교회를 떠나면서도 복음은 버리지 않을 각오로 작가의 길을 선택했으나 갖은 실패와 아무도 이해하지 않는 고독 속에 살아야 했다.


그의 인생은 어떤 면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같기에 예술을 통해 성덕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크리스챤 영성의 핵심은 균형과 조화에 있다. 인생의 어떤 것을 극단으로 강조하면서 다른 것을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균형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 둘이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늘을 즐기며 살아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며 오랫동안 크리스챤들의 삶을 떠받치던 두 정신적 지주였다. 


이 둘은 정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지나치게 최후심판이나 멸망을 강조하는 죽음의 기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서 인생의 기쁨을 너무 종교적인 차원에서 제한받게 만들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속의 이분법적 생활 태도를 조장한 것도 사실이다.

  

성서 작가처럼 아내와의 행복한 삶이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알리기보다 범죄나 불륜에 대한 것을 더 많이 강조함으로서 신자들의 삶을 인간적으로 위축되게 만들기도 했다.


‘인생을 즐기라’(Carpe diem)이라는 말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으로 성서적 사상과 너무 맞아 떨어지기에 유럽 사회에서 사용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Carpe Diem, Minimum Credula Postero. “오늘을 잡아라, 내일은 거의 믿지 말고.” 


다가올 죽음을 의식하기에 오늘을 더욱 충실히 살라는 충고는 어쩌면 솔로몬의 지혜와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작가는 해바라기로 너무나 알려 질만큼 그의 많은 작품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삶의 생기를 주기에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처지에  이 작품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세상의 허망함 뿐 아니라, 언젠가 인생은 죽음을 맞아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오늘에 최대한으로 충실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요 행복임을 알고 있다는 면에서 인간 삶의 긍정적인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반 고흐의 어떤 작품 못지않게 크리스챤 신앙의 깊은 내면,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둔 삶을 현실에 충실한 삶과 조화시켜 살면서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크리스챤 삶의 여유로우면서도 향기 있는 삶을 제시한 좋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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