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오늘의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한다.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제2독서인 야고보서에서는 “말씀을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역시 권고합니다. 이렇게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라는 독서의 권고말씀을 듣고, 이어지는 복음말씀을 들으니 오늘의 복음말씀안에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행해야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라는 권고의 초대이며, 복음말씀은 그 실행방법을 안내해주는 초대라고 이해됩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유다인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판하며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하며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하시고,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꾸짖으십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를 꾸짖으시며,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행해야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가르침을 주신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두 가지는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과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의 모습이 어찌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제 자신 안에도 이런 형식주의와 완벽주의의 성향이 있음을 발견하며, 복음말씀에서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꾸지람을 제 자신에 대한 꾸지람으로 듣고 형식주의와 완벽주의에 대하여 성찰해 봅니다.
먼저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에 대한 성찰입니다. 제 자신 안에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이건 이렇게 혹은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율법과 규정들이 있습니다. 이런 율법과 규정들중에는 제 자신의 성향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 여러 가지 있음을 발견합니다. 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율법과 규정들 즉, 하늘로부터 오지 않고 스스로의 성향으로 만들어 낸 율법과 규정들의 특징은 그것으로 자신 혹은 타인을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과 규정들은 사람을 판단하게 합니다. 자신과 타인을 쉽게 판단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율법과 규정들이며 이러한 율법과 규정들은 부자유스러운 어떤 형식을 만들어내어 형식주의에 이르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만들어낸 형식은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 안에서 만든 이런 저런 형식이 강하게 있다보니 그 형식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신과 타인 모두를 판단함으로써 부자유스러움에 스스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빠져든 그 부자유스러움은 주변 사람들의 자유로움에도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성서 전반에 걸쳐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에로 불러주셨고, 예수님께서도 온갖 병마와 죄악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로 해방시키시어 자유에로 불러주십니다. 그러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유롭게 사랑하라는 부르심으로 초대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형식주의는 하느님의 초대와 반대되는 정신이라고 보여집니다.
다음으로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에 대한 성찰입니다. 제 자신 안에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모든 율법과 규정을 완벽하게 지켜야한다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살아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니 나도 완전한자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완벽주의의 뒤에 가리워진 숨은 마음을 발견합니다. 나도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겠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힘을 뒤로하고 내 힘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불신앙이 숨어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완전한자 되겠다는 생각은 자신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미숙한 상태가 숨어있습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완전해지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완전한자 되겠다고 발버둥침에 있지 않고, 그 반대로 유한하고 불완전한 자기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자신의 유한하고 불완전함을 비우고 또 비워내어, 완전하신 하느님을 마음에 모심으로써 그 완전하신 분의 힘으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더욱 죽여야하고, 자신을 더욱 비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비운 그 만큼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유한하고 불합리하고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인간 존재가 완전성을 향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완전하신 분을 받아들이는 길 뿐입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완벽하게 모든 일을 해 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미숙한 생각인지를 성찰하게되고 이러한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말씀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두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을 방해하는 형식주의와 하느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보겠다는 완벽주의를 벗어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형식주의를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아무 걸림돌 없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고, 완벽주의를 벗어나 자신을 죽이고 비움으로써 완전하신 분을 마음에 모셔 그 분의 힘으로 완전한자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라는 독서의 권고말씀을 듣고, 이어지는 복음말씀을 들으니 오늘의 복음말씀안에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행해야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라는 권고의 초대이며, 복음말씀은 그 실행방법을 안내해주는 초대라고 이해됩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유다인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판하며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하며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하시고,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꾸짖으십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를 꾸짖으시며,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행해야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가르침을 주신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두 가지는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과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의 모습이 어찌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제 자신 안에도 이런 형식주의와 완벽주의의 성향이 있음을 발견하며, 복음말씀에서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꾸지람을 제 자신에 대한 꾸지람으로 듣고 형식주의와 완벽주의에 대하여 성찰해 봅니다.
먼저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에 대한 성찰입니다. 제 자신 안에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이건 이렇게 혹은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율법과 규정들이 있습니다. 이런 율법과 규정들중에는 제 자신의 성향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 여러 가지 있음을 발견합니다. 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율법과 규정들 즉, 하늘로부터 오지 않고 스스로의 성향으로 만들어 낸 율법과 규정들의 특징은 그것으로 자신 혹은 타인을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과 규정들은 사람을 판단하게 합니다. 자신과 타인을 쉽게 판단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율법과 규정들이며 이러한 율법과 규정들은 부자유스러운 어떤 형식을 만들어내어 형식주의에 이르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만들어낸 형식은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 안에서 만든 이런 저런 형식이 강하게 있다보니 그 형식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신과 타인 모두를 판단함으로써 부자유스러움에 스스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빠져든 그 부자유스러움은 주변 사람들의 자유로움에도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성서 전반에 걸쳐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에로 불러주셨고, 예수님께서도 온갖 병마와 죄악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로 해방시키시어 자유에로 불러주십니다. 그러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유롭게 사랑하라는 부르심으로 초대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형식주의는 하느님의 초대와 반대되는 정신이라고 보여집니다.
다음으로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에 대한 성찰입니다. 제 자신 안에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모든 율법과 규정을 완벽하게 지켜야한다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살아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니 나도 완전한자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완벽주의의 뒤에 가리워진 숨은 마음을 발견합니다. 나도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겠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힘을 뒤로하고 내 힘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불신앙이 숨어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완전한자 되겠다는 생각은 자신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미숙한 상태가 숨어있습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완전해지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완전한자 되겠다고 발버둥침에 있지 않고, 그 반대로 유한하고 불완전한 자기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자신의 유한하고 불완전함을 비우고 또 비워내어, 완전하신 하느님을 마음에 모심으로써 그 완전하신 분의 힘으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더욱 죽여야하고, 자신을 더욱 비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비운 그 만큼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유한하고 불합리하고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인간 존재가 완전성을 향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완전하신 분을 받아들이는 길 뿐입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완벽하게 모든 일을 해 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미숙한 생각인지를 성찰하게되고 이러한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말씀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두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을 방해하는 형식주의와 하느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보겠다는 완벽주의를 벗어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형식주의를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아무 걸림돌 없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고, 완벽주의를 벗어나 자신을 죽이고 비움으로써 완전하신 분을 마음에 모셔 그 분의 힘으로 완전한자 되고 싶습니다.
완전한 자녀를 두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