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회개?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탁 드는 느낌,
또 회개?
정말 구약이든 신약이든 왜 이렇게 회개하라고 난리인지.
회개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왜 머리가 지끈거리겠습니까?
회개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되지는 않으니 그러겠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회개를 해야 되는데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제가 회개를 하면 다 되는 것인데 되지 않는다고 하니,
능동적이지 않고 “안 되다”는 수동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안 된다는 말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하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안 된다고 생각하니 시작도 하지 않는 거 아니냐고 남에겐 말하였는데.
그러면서 정작 저는 회개하려는 노력은커녕 마음도 먹지 않고
“안 돼”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습니다.
수없이 노력해보고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몇 번 노력해보고 안 된다고 빨리 포기한 것 같습니다.
될 때까지 해야 하는데,
되기 전에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석수의 돌 쪼기를 생각해봅니다.
100번을 쪼아야 돌이 쪼개집니다.
100번째의 돌질에 돌이 쪼개지지만
그 앞의 10번째, 20번째, 50번째, 그리고
바로 앞의 99번째의 돌질이 없었으면 돌은 결코 쪼개질 수 없습니다.
100번째라는 것은 그 앞의 것들이 모여 100번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홉 번째, 열여섯 번째 돌질이 모두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첫 번째와 백 번째가 더 중요한 것은
첫 번째가 없었으면 그 다음의 모든 것도 없었을 것이고,
백 번째가 없으면, 다시 말해 99번째에서 멈추면 돌은 쪼개지지 않고
그 앞의 수고가 다 헛것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회개하려는 그 첫 마음과 노력이 중요하고,
회개가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회개에 끝이 있나요?
용서에 대해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냐고 물었을 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끝이 없이 회개를 해야 되는 것이고,
끝은 없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얘기했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에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회개하지 않으려 하고 시작도 못하니
주님께서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시작에 대한 얘기만 있고 회개를 완성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년에 형제들에게 이렇게 얘기하였지요.
“지금까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으니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성인도 이러하매 저도 용기를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