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광합성
포르치운쿨라 축제는 800년 가까이 이어오는 프란치스칸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
그 후예들이 포르치운쿨라 축일에 프란치스칸의 근본 이상을 찾아
포르치운쿨라를 방문한 데서 비롯됩니다.
포르치운쿨라는 프란치스칸 운동이 시작된 곳이니
모든 프란스칸들이 지금도 포르치운쿨라를 찾는 것은
마치 설 명절에 자기 근본을 찾아 고향을 방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올 해는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것은 올 해가 글라라 수도원 창설 8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800년 전인 1212년 성지주일 밤에
글라라는 프란치스코를 따르기 위해 가출을 하였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야반도주를 한 것이고,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프란치스코를 따라 출가를 한 것인데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출가일을 성지주일로 잡습니다.
주님께서 화려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지만
사실은 수난 당하시려고 입성하신 것처럼 글라라도
이날 화려한 옷을 마지막으로 입고 성지주일 미사에 참석한 뒤
그날 밤 프란치스코를 따라 주님 수난의 길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글라라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유언에서 얘기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우리가 받는
여러 가지 은혜 중에 가장 큰 것은 우리들의 성소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요한 14,6)이 되셨는데,
그분의 연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글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와 자신의 관계를
아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와 하느님 사이에 나 있는 길, 곧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내려오시고, 자기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이시고,
프란치스코는 그 길을 가리키고, 가르쳐주는 존재라는 것을.
이는 마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주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니 따르라고 한 것과 같고,
길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도로 표지판이나 약도와 같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면 얼마나 고마워하고,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면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그래서 글라라는 자기에게 이 길을 알려준 프란치스코에 대해 감사하며
그가 일러준 대로 그 길을 충실히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도 글라라처럼
프란치스코가 일러준 이 길을 따르고자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글라라처럼 이 길을 따르고자 모인 여러분께
지난 일주일동안 저와 저희 수련자들이 경험한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희들은 지난 7월 26일 대전을 출발하여 이곳까지 걸어왔습니다.
글라라 성녀가 그 밤에 집을 도망쳐 포르치운쿨라 성당에 있는
프란치스코에게로 간 그 밤길 6Km를 생각하며
160Km를 저희도 같은 마음으로 가기로 한 것이지요.
그리고 “글라라 성녀의 꿈과 이상을 따라”를
저희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은 우선 떠남이요, 포기입니다.
간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떠나지 않고 가겠다는 것은 제주도를 가고 싶다고 하면서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제주도를 가고 싶으면 내 살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익숙한 나의 삶의 자리, 편안한 삶의 자리,
곧 안정을 포기해야 합니다.
안정은 쉽게 안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라라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가난을 선택하였는데
글라라에게 있어서 가난이란
안安이 없는 것, 곧 불안不安이었고,
안정安定이 없는 것, 곧 불안정不安定이었으며,
편안便安함이 없는 것, 곧 불편不便함이었습니다.
아무튼 저희는 이런 것을 각오하고 7월 26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대전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길에 오가는 많은 사람을 봤습니다.
그들과 저희는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편히 그리고 빨리 가는데
저희는 그 뜨거운 길을 힘들게
그리고 천천히 하루에 30Km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남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갔는데
저희는 남자들끼리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그들은 맛있는 것 먹으면서 여행을 즐기는데
저희는 물을 너무 먹어 더위를 먹으며 고행을 즐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왔지만
저희는 편하게 가는 그들이 결코 부럽지 않았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저희 마음 안에서는
그 힘든 것만큼 열망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걷는 내내 고통이 너무 컸지만
저희는 즐기며 가는 그들이 결코 부럽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고스란히 사랑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대전을 떠나 이곳까지 오면서 사람만 본 것이 아닙니다.
전에 쉽게 지나쳤던 동물도 봤고 식물도 봤습니다.
저희는 서로 이 꽃이 무슨 꽃일까 묻고,
이 꽃이 무슨 꽃임을 서로 알려주면서 걸었습니다.
TV에서나 보던 나뭇가지로 위장하는 신기한 벌레도 봤고
차에 치인 많은 동물 사체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스팔트 길 온도가 38도까지 오르는 한 낮이면
호박이나 고추까지 그 이파리가 축 처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화상을 입히고 숨까지 턱턱 막히게 하는 그 열기를
묵묵히 견디는 논의 벼를 비롯한 온갖 식물들의 위대함을 봤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참으로 많은 은총 묵상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은총도 저 식물들의 광합성 작용과 같음을 말입니다.
논의 벼나 나무의 과일은 햇빛을 먹고 자란다지요.
그러니까 그 뜨거운 햇빛을 받아 생명 에너지로 바꾸는
이 광합성 작용이 없으면 어느 식물도 살 수도 열매 맺을 수도 없는데
이 광합성 작용이 바로 고통스런 은총 체험이며,
그러니까 식물들에게 햇빛은
생명의 은총이기도 하지만 견뎌야 할 고통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 여름 땡볕보다 더 뜨겁고 그래서
한 여름 땡볕보다 더 우리에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고
고통을 겪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은총 체험인 것입니다.
이 고통이 사랑이기에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고통을 사랑하였고
그 결과 주님 오상의 은총을 똑같이 받았습니다.
글라라는 어떠하였습니까?
1212년 18살의 나이에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들어가
1253년 우리나라 나이 예순 살에 죽을 때까지
그 감옥과도 비좁은 수도원에서 살았고,
41년을 오직 십자가만을 관상하며 살았습니다.
관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사랑한 그가 이제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거울의 맨 위를 보시고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관상하십시오.
그대가 이렇게 하신다면
그대 안에 이 사랑의 불이 날로 더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