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체념의 무덤을 열고 2
믿음은 확실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결합 상품이 아니다.
믿음은 신비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여정이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의 신뢰 관계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출발점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믿으시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우리가 응답하는 결과에 따라 믿으시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벌써 떠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을 거슬러 자기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답례를 바라시지만,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신뢰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의 근원이다.
거기서 우리는 건강한 자기 확신을 키워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으로부터 발생하는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실천적인 응답으로 ‘너’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
자신의 삶과 감정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책임을 지는 실천이 응답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응답으로 신뢰의 관계를 만들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게 한다.
나에게만 적용하던 생명의 에너지를 너를 향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으로만 사용하던 에너지는 거짓 유령들이다.
거짓 유령들에게 점령당한 존재는 하느님과도 너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자기 자랑, 위선, 거짓말, 합리화, 변명, 교만과 자만심,
그리고 과대포장과 과장 광고가 유령들의 실체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하느님과 지신에 대한 개인적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유령들이 점령한 우월감과 강박관념의 땅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마음껏 자신을 토로할 수 있는 인간적인 하느님과
따스하고 친밀한 마음의 관계를 발전시켜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내용이다.
자신의 마음을 열고 추상적인 사고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불안을 주는 공포와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나누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공포와 감정을 숨기고 겉에만 맴돈다.
하느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과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자신의 공포에 대해 웃을 수 있도록 돕는다.
건강한 자기 확신은 거기서 성장한다.
빠르게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면 익사하거나 실종된다.
강물을 거슬러 헤엄을 치는 것이 믿음의 현실이다.
벌주지 않으시며, 실수해도 괜찮고, 약점이 있어도 개의치 않으시는 하느님,
친근하고 분노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때
불안과 초조와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 4,18)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확신은
두려움 없는 용기로 너를 동반하고 부축하도록 생명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내적 권위가 거기서 생기고 그 권위는 부활의 증인으로 우리를 일상으로 파견한다.
2020, 4, 26 . 영명축일에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