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 손녀가 또 태어났습니다.
12명의 조카에게서 12번째 손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이 태어나기 전에 제 조카딸을 많이 힘들게 했답니다.
첫 째 때는 애를 가지고도 직장 생활을 다했는데
이번에는 몇 개월 휴직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어제 그 조카딸이 힘겨운 중에도 전화로 새해인사를 했는데
속으로 이렇게 애를 먹이는 놈이 어떤 놈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 놈이 드디어 밖으로 나온 것이고 그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계집아이고 3,4Kg 나가는 건강한 아이입니다.
공현주일이어서인지
이 아이가 태어난 것과 주님 공현의 의미가 즉시 연결되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고 어떤 놈인지 몰랐는데
이렇게 태어남으로 모두가 볼 수 있게 되었고
어떤 놈인지 모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당신을 보이지 않으시면 찾을 길 없고
우리는 도무지 그분을 만나 뵐 길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검은 장막 안에
당신을 숨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자어에 黑이 있고 玄이 있지요.
둘 다 검다, 어둡다는 뜻인데
자기 폐쇄, 빛의 차단과 단절인 黑과는 달리
玄은 자신을 폐쇄하지 않고 감추지 않고 내보여도
우리의 바라봄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에 우리 눈에 어두운 것입니다.
물로 치면 黑이 구정물, 흙탕물이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玄은 깨끗하지만 그 물이 너무 깊어 속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비의 구름에 가려있는 존재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권고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아버지는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신다.”
빛이시지만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에 계시기에 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둠입니다.
빛이 내게 없는 것이 우리의 어둠이고
빛에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어둠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다가갈 수 없다면
그분이 다가오셔야만 만나고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볼 수 있습니까?
저는 청와대를 딱 한 번 들어가 봤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초청 때 저도 남자 수도자 대표로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들어가 대통령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청와대를 열거나 대통령이 청와대를 열고 나와야만
우리가 대통령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듯이
하느님도 신비의 구름을 당신이 열고
당신이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셔야만 볼 수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신 빛이십니다.
그 빛을 보기 전에 우리는 캄캄한 어둠이었고 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으로 빛이신 하느님을 뵙고야
우리는 모든 것을 대낮같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본 사람들이고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아주셨고
당신 아들이라고 독점하지 않으시고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낳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그분을 모시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그분을 낳음으로써”
12명의 조카에게서 12번째 손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이 태어나기 전에 제 조카딸을 많이 힘들게 했답니다.
첫 째 때는 애를 가지고도 직장 생활을 다했는데
이번에는 몇 개월 휴직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어제 그 조카딸이 힘겨운 중에도 전화로 새해인사를 했는데
속으로 이렇게 애를 먹이는 놈이 어떤 놈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 놈이 드디어 밖으로 나온 것이고 그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계집아이고 3,4Kg 나가는 건강한 아이입니다.
공현주일이어서인지
이 아이가 태어난 것과 주님 공현의 의미가 즉시 연결되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고 어떤 놈인지 몰랐는데
이렇게 태어남으로 모두가 볼 수 있게 되었고
어떤 놈인지 모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당신을 보이지 않으시면 찾을 길 없고
우리는 도무지 그분을 만나 뵐 길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검은 장막 안에
당신을 숨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자어에 黑이 있고 玄이 있지요.
둘 다 검다, 어둡다는 뜻인데
자기 폐쇄, 빛의 차단과 단절인 黑과는 달리
玄은 자신을 폐쇄하지 않고 감추지 않고 내보여도
우리의 바라봄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에 우리 눈에 어두운 것입니다.
물로 치면 黑이 구정물, 흙탕물이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玄은 깨끗하지만 그 물이 너무 깊어 속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비의 구름에 가려있는 존재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권고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아버지는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신다.”
빛이시지만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에 계시기에 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둠입니다.
빛이 내게 없는 것이 우리의 어둠이고
빛에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어둠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다가갈 수 없다면
그분이 다가오셔야만 만나고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볼 수 있습니까?
저는 청와대를 딱 한 번 들어가 봤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초청 때 저도 남자 수도자 대표로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들어가 대통령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청와대를 열거나 대통령이 청와대를 열고 나와야만
우리가 대통령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듯이
하느님도 신비의 구름을 당신이 열고
당신이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셔야만 볼 수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신 빛이십니다.
그 빛을 보기 전에 우리는 캄캄한 어둠이었고 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으로 빛이신 하느님을 뵙고야
우리는 모든 것을 대낮같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본 사람들이고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아주셨고
당신 아들이라고 독점하지 않으시고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낳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그분을 모시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그분을 낳음으로써”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은 제자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제자가 하나라도 더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칩니다.
또한 상대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헤아려
상대의 처지에 자신을 맞추는 배려의 마음 안에서
가슴 뭉클한 그 무엇을 느낄 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건 아닐까 싶어요.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가 더듬어 찾기만 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그분을 모시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그분을 낳음으로써”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이시지만,
혼과 혼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고맙습니다.
그리고,
손자를 보신 기쁨에 함께 기뻐하며
몸과 마음이 튼튼히 자라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