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의 초상 (최후의 심판의 중앙 부분 1541)
작가 :미켈란젤로 부르나요티 (Michelangelo, Buonarroti:1495-1564)
크기: 1539.37 x 480.31 / 1370 x 1220 cm, Cappella Sistina, Vatican, 프레스코
소재지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Capella Sistina)
크리스챤의 부활 신앙은 인간으로서 가장 처참하고 실패한 인생의 상징인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죽음이 없는 생명으로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신앙이기에 크리스챤들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오늘도 부활한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 주님이시기에 성화에 대해 부정적 사고를 가진 개신교 교파를 제외하고는 다 나름대도 그리스도의 초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도였던 렘브란트는 당시 암스텔담에 살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는 자기가 겪은 인생 고뇌가 녹아든 초상화를 예수님과 접목시켰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이 유대인임을 표현하기 위해선 유대인들을 모델을 이용하고, 주님께서 겪으셨던 많은 고통과 시련의 표현을 위해선 말년에 그가 겪어야 했던 여러 어려움속에 살아야 했던 그의 초상화를 모델로 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 서양 예술의 발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향을 주었다.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가톨릭 교회는 두 개의 큰 사건으로 교회 위상에 대단한 상처를 받았던 시기였다.
교회가 자기 부패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시작된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북 유럽의 많은 지역을 개신교에 빼앗김으로 교회의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그러나 이런 실수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중심인 로마에 치명적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당시 유럽의 큰 정치 세력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 중간에서 세상 수준의 지도자의 모습을 보인 지혜롭지 못한 참극이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영토인 독일에서 가톨릭에 대해 대단한 증오심을 지녔던 루터파 용병들을 동원해서 로마를 침략하게 만들었다. 파죽지세로 몰려온 이들은 로마의 교회를 파괴하고 수도자들을 학살 강간하면서“구원의 성도“로 여기던 로마를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로마의 약탈(Il Sacco di Roma: 1527)라는 이 사건은 너무도 충격적이며 비참한 것이었기에 에라스무스 같은 학자는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닌 한 문명의 멸망’이라고 탄식할 만큼 비참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실추된 교회 이미지의 쇄신과 만신창이가 된 신자들에게 가야 할 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이 주제의 작품을 그리기로 하고 교황 바올로 3세가 작가에게 맡겼을 때 예순이 된 나이에도, 작가는 교회 쇄신에 협조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의 제작을 맡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맡으면서 전통적 주제와 전혀 다른 착상으로 제작했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주제는 중세 교회 예술의 빠트릴 수 없는 주제였다. 중세인들은 계속되는 전쟁, 흉년과 기근, 페스트의 창궐 등 인간 삶의 터전이 너무도 큰 타격을 입으면서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이것이 하느님의 벌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최후심판이라는 주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각인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 또한 신자들에게 죄와 심판의 두려움을 너무 강조하는 것으로 신자들을 묶어두고자 했기에 고틱 대성당의 중앙문은 항상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타나고 있는 착한 삶을 살았던 의인은 양으로 묘사되어 오른편에, 악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염소로 묘사되면서 왼편에 앉고 중앙엔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가 저울추를 들고 사람들을 심판하던 것이 필수 조건인양 제작되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런 경향에서 탈피해서 당시 르네상스 운동으로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랍 문화의 배경으로 최후의 심판을 제작했다. 즉 작가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협조로 동방교회와 일치를 위해 시작된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서방 교회에 차단되어 있던 신플라톤 철학이 피렌체에 들어왔을 때 여기 심취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 역시 신 플라톤 신학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작가의 착상은 참으로 오늘까지도 경탄을 일으키는 혁명적이며 예언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전 시대까지 하느님의 신성을 지극히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가치는 억압되어 있다가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희랍 로마의 예술이 재가치를 찾게 되자,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던 르네상스 정신으로 작품을 표현하면서 최후 심판이라는 주제를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던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새롭게 각색했으며 이것은 작가의 파격적 일뿐 아니라 대단히 예언적인 모습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1973년 미술가들에게 하신 연설에서 교회 예술이 지녀야 할 예언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현대 화가는 어느 면에서 현대 세계의 예언자이며 시인입니다. 현대인의 사고 방식, 현대 사회를 가르켜 보이는 예언자이며 시인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이런 표현을 약 500년전에 이미 실천했던 대단한 선각자였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켈란젤로의 탁월한 존재성을 인정하게 마련이나 크리스챤으로서 그의 예술에 대한 공감과 존경은 그의 천재적 탁월성의 표현만이 아니라 바로 그의 시대적 표징을 깊히 이해하고 표현한 과감한 예언성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혁신이었고 가이 혁명적이란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성(詩聖)단테(1265- 1321)은 그의 불휴의 명작인 신곡 (La Divina Commedia; 1308- 1321)에서 기원전 7세기 로마 제국의 시성이었던 베르질리우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을 순례하게 되는데, 이것은 크리스챤적인 최후 심판과 당시 유럽인들에게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희랍 로마의 신화와 사상을 조화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호기심과 감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크리스챤적인 최후 심판을 그리스도 이전에 로마 제국에서 고귀한 삶을 살았던 시인의 사상과 연관시켜 설명한 것은 작가가 지닌 수준높은 인문학의 바탕을 배경으로 했기에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단테가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어떤 예언자를 길잡이를 선택하지 않고 고귀한 인생을 살았던 로마의 시인을 안내로 선택한 것 역시 대단한 인문학에 바탕을 둔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사회 종교 일각에서 성서나 경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실천하는 것을 정통으로 여기며 이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비인격적인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코로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극명히 드러나는 현실에서 차원높은 인문학적인 바탕에서 성서를 표현함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작가의 천재적인 발상임과 동시 이것을 받아 들일수 있던 가톨릭 교회의 자랑스런 표현의 하나이다.
작가는 등장 인물 391명 중, 몇 명을 제외하고 전체를 나체로 묘사함으로서 육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던 희랍 조각의 표현을 과감히 수용하면서 영혼은 선, 육신은 악으로 치부되던 중세적 이원적 사고방식의 경직된 표현에 새로운 도전장을 던졌다.
즉 중세기에 마귀, 세상 육신을 죄의 근원으로 여기던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어 영혼과 육신으로 된 인간의 육신도 하느님의 선성을 표현하는 좋은 도구임을 과감히 선포했다.
작가의 천재성은 작품을 통해 당시 교회로서는 상상이 어럽던 구약 창세기 1장에 나타나고 있는 건강한 육체의 신학을 시각적으로 정확하고 과감히 표현했다.
중앙에 서계신 심판주 그리스도는 그전까지 전통적 기법에 등장하던 수염을 기르고 중후한 심판주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전까지의 예수의 모습은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임을 강조하기 위해 위엄있는 근엄한 모습을 많이 강조했다.
르네상스 이전 탁발 수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기 시작하기 전 까지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이 일방적이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고 인간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인간을 보호하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주는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희랍 신화에 등장하고 있는 건장한 육체에 수려한 용모을 지닌 아폴로 신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심판주의 모습은 심판 후 천국에서 새로 태어날 인간들의 모습을 미리 표현함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작품이기에 더 없이 아름답다는 크리스챤 인간관의 긍정적인 면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강생 신학을 가지고 있으나 그동안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육체에 대한 긍정적인 차원 보다도 육체는 곧 죄와 연관된다는 부정적인 차원을 더 강조한 함으로서 육체의 성서적 의미성을 억압하고 퇴색시킨 것이 사실이었다
중세기 교회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준 플라톤 철학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기에 영혼은 육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맑고 순수한 영혼은 더럽고 추악한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났을 때 자기의 고향인 천상의 맑은 세계로 오를 수 있기에 영혼은 항상 육체를 경시했을 때 하늘 나라의 세계를 향유할 수 있다. 영혼은 진선미의 존재지만 육체와 육체에서 생기는 추잡한 욕망 때문에 더러워졌다."
그러나 창세기에 보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죄성이 없다는 것을 순수한 나체로 표현되고 있기에 등장인물들을 모두 나체로 표현한 것은 파격적으로 성서적 가르침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심판주이신 주님은 과거의 심판주처럼 죄인들을 지옥으로 추방하는 심판주가 아니라 자비롭고 의로운 존재로서 인간들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분이심을 오른손을 천사들이 있는 천상계를 향하여 들고 계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을 들고 천사들과 성인들이 있는 천상계를 가르키고 있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구원을 향한 애타는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 주님께서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계시는데 이것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분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나면 자기 틀을 보호하기 위한 많은 법을 만들게 되고 이런 법의 많은 것은 예방이나 자비의 표현보다는 교역자들은 하느님의 엄격한 모습을 정의의 표현으로 자주 강조함으로서 ,교회가 신선하고 생기있는 곳임을 보이지 못하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고리타분한 곳으로 여겨지게 만들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5세기 전에 바로 현대 신학이 강조하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 너무도 사랑이 많고 멋진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표현했다.
오른편에 성모님이 계신다. 성모님은 심판주이신 당신 아들 곁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들인 죄인들을 위해 전구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계신다. 여기에서 성모님은 심판주 예수님의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심판 받을 중생들의 어머니로 역할을 하고 계신다.
그런데 성모님의 모델은 미켈란젤로의 절친한 친구였던 귀족 부인인 빅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a)를 모델로 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성격 역시 까다로운데다 작품 제작에 너무 바쁘게 살아야 했기에 작가는 항상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으나 고귀한 인품의 콜론나 부인과의 교제를 통해 성숙한 우정을 키울 수 있었다. 소위 오늘날 자주 거론하는 플라토닉 러브의 상대로서 서로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좋은 우정의 관계였다.
콜로나 부인은 열심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교회의 모든 것을 다 옳다고 여기는 그런 맹신적 열심한 신자가 아니라 , 당시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의 부페를 마음 아파하면서 오히려 말틴 루터의 견해에도 동조할 만큼 그 녀의 신앙은 열려 있었으며 소심하거나 비굴함이 없는 여인이었다.
교회의 권위에 굽신대고 아부하는 것을 순명으로 여기지 않고 그는 교회에 대한 정확하고 과감한 비판을 통해 교회를 정화시키고자 했던 개혁자였다.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을 이런 실재 인물로 등장시킴으로서 작가는 크리스챤 신앙 표현에 있어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인간적인 교양에 바탕을 둔 건강한 지성과 이성의 중요성과 고귀성을 강조했다.
미켈란젤로 조각가 화가일 뿐 아니라 문학에 있어서도 대단한 경지에 있었으며 성서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대단한 교양이 있었기에 콜론나 부인과 같은 정신적인 귀족인 교양인과 우정을 유지함으로서 이 무르익은 우정의 결실이 이 작품안에 녹아 있기에 어떤 작품 보다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성모님의 곁에 나체의 등을 보이고 X형 십자가를 들고 있는 이는 사도 안드레아이며 그 밑에 석쇠를 들고 있는 사람은 성 로렌죠 성인이시다. 성 노렌죠는 초세기 교회가 얼마나 복음의 이해에 정확했던지를 알리는 좋은 성인이셨다. 그는 교회의 부제로서 가난한 신자들을 돌볼 책임을 맡았는데 ,그 책임에 얼마나 성서적으로 철저했던지 가난한 신자를 만나면 교회의 성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우곤 했다.
이것을 교회 재산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긴 로마 집정관의 재판에 걸려 석쇄에 굽혀 순교했다는 성인이며 초대교회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던 성인이었다.
그 옆에 얼굴이 새겨진 가죽을 들고 서 있는 분은 성 발톨로메오인데 전승에 의하면 그는 가족이 벗겨 순교하는 형벌을 받은 사도이셨다. 그런데 대단한 자유인이었던 작가는 여기 벗겨진 가죽에 자기 얼굴을 새김으로서 교회로부터 그가 받아야 했던 고통과 울분을 표현했다.
작가는 그의 유명세에 의해 3명의 교황 밑에서 일해야 했고, 당시 유럽의 최고 지도자였던 교황 중엔 이상한 사람도 많고 요구 사항도 너무 다양했기에 작가는 교황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가 작품 제작에 대단한 영감을 받은 단테의 신곡에서 교황권의 타락과 제도권의 모순과 위선을 과감히 고발하고 정죄한 것처럼 그 역시 교황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기의 일생이 교회에 의해 파괴되고 혹사되었다는 울분을 품고 살았기에 발톨로메오 사도를 그리면서 과감히 자신의 울분을 여기에 새기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서 교회 정화의 필요성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부페의 상징과 같은 교황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실망과 분노를 자기 얼굴을 새기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는 비록 평신도 예술가였으나 성서에 대한 나름대로 심원한 이해가 있었기어 성서적인 것과 거리가 먼 권위나 권력에 강한 거부의 몸짓을 보였던 영원한 자유인이었기에 이 작품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공포나 절망감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의 안배안에서 용기있는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성서적 자유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프레스코( Fresco)라는 말이 표현하는 것처럼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쾌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시 부패하고 정신이 나간 처신으로 교회의 위상을 실추시킨 교황 이하 다른 성직자들이나 , 너무도 피폐된 교회의 모습에 실망한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전통적인 최후 심판의 표현 즉, 죄를 피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에 서야 하고 이렇기 위해선 좁은문(성서구절)을 들어가기로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천상과 지옥의 중간에 최후 심판의 나팔을 부는 천사를 통해 구원에 길은 좁고 멸망의 길은 넓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강한 멧세이지를 표현했다.
최후 심판의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 아래 두 명의 심판관이 심판자 명단이 있는 장부를 들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들고 있는 장부는 구원받을 사람들의 명단인데 이것은 생전에 주님 뜻을 따르기 위해 온갖 시련을 겪으며 노력했던 사람들의 명부이며 그 옆에 있는 멸망할 사람들의 명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모습이다.
작가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예술가로서 지닌 자유분방한 성격과 함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두려움에 가까운 세심한 경각심을 지니고 살았기에 이 부분은 자신의 신앙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완성되어 공개되었을 때 ,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의 극단의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한 쪽은 경탄이었고, 다른 쪽은 경악이어서 이런 사람들은 수단방법을 다해 이것을 제거할려고 했으나 당시 이것을 부탁했던 교황이 이 작품의 보존을 찬성함으로서 반대파를 꺽을수 있었으나, 교황이 세상을 떠난후 이 작품은 외설적인 면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전체 등장인물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오늘 이 작품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크리스챤 교리를 알리는 역할이 아니라 인간 삶의 위대함과 신앙의 가치가 혁신적으로 표현될 때 얼마나 삶을 생기있게 만드는 지를 알리는 좋은 증거물로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작가는 당시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간의 가치가 강조되던 현실에서 교회안에서도 신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작품을 새롭게 제작했다.
작가의 이런 시도는 러시아의 톨스토이에 와서 재확인되었다. 러시아 정교 독실한 신자였던 톨스토이는 자신아 믿는 정교회가 예수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공허한 교리체제의 잘못으로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인성을 등한히 한 것을 마음 아파하며 고발했다.
그는 예수의 신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기들의 권위가 다 신적인 권력임을 강조하면서 처신하는 정교회의 모습은 종교의 본질을 흐리는 것으로 지적했다.
이 주장의 근거로 예수님은 비록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임을 드러내길 너무 좋와했으며 이것은 어떤 때 오해를 받으면서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할 때에도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임을 통해 자기의 인간성을 강조하셨다
이 작품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가 신경을 써야 할 중요한 점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교회가 새로움으로 닥아오기 위해선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신앙의 눈으로 오늘의 교회가 복음화를 위해 해야 할 방법론을 제시하는 안내서로 볼 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세상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도전해야 할지를 알리는 좋은 멋진 도전장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