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 5장에서부터 7장은 산상수훈, 곧 산 위에서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필요에 응답하시는
기적을 공생활 내내 행하시는데 오늘 나병 환자의 치유가 그 첫 번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든 다 사랑이십니다.
가르치심도 사랑이요 치유도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을 구분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가르침과 치유 중 어떤 것이 주님께서 더 주시고자 하신 사랑,
그러니까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신 사랑일까요?
마태오 복음을 보면 공생활 후 제일 먼저 하신 것이 산상수훈이고
그런 다음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태오 복음이 생각하는 유익함의 순서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시급성으로 보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고,
지금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치유해주는 것이 더 필요한 사랑이겠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인생을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더 필요하고 유익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많은 사람의 고통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치유해주시는데 오늘 제일 먼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치유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놓고 왜 누구의 병은 고쳐주시고, 누구의 병은 고쳐주지 않으시는지
공평치 않다고 공평성의 차원에서 얘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병장수케 하는 것이 주님 사랑의
최종 목적이요 완성이라면 정말 모든 사람을 치유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의 최종 목적이요 완성은
우리의 전인적이고 신앙적인 구원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모든 치유는 우리가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보다 먼저 병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주님께서 의사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시지는 않고 병만 고쳐주신다면
일반 의사와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늘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반성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와서 그냥 직업적으로 의사생활을 하고
돈벌이를 위해 의사생활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가운데
우리 신앙인들 중에서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지요.
내일 저는 우리 프란치스칸 의료인들과의 만남을 할 예정인데
이분들은 매달 한두 차례 이주민들을 위해 무료의료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만일 아무리 숭고한 사랑을 실천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랑에 참 아쉬움이 많지요.
그런데 의료인들이 그렇다면 영혼의 의사라고 할 수 있는 저와 같은 성직자,
수도자들은 어떠해야겠습니까?
성직자들이 신자들의 구원을 생각지 않고 그저 사목만 한다면,
수도자들이 신자들의 영성생활은 도모하지 않고
그저 자기의 영성생활만 신경쓰고 더 나아가 수도자답지 않게 산다면
아무리 독신생활을 하고 하느님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만족일 뿐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그저 인간적인 사랑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구원적인 사랑이 되어야 함을
주님의 치유 기적 안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믿음의 담금질)
http://www.ofmkorea.org/106288
15년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뜻)
http://www.ofmkorea.org/79181
13년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믿기에 청하고, 더 믿기에 고백한다.)
http://www.ofmkorea.org/54626
10년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갓난 아기처럼)
http://www.ofmkorea.org/4152
09년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http://www.ofmkorea.org/2717
08년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사랑케 하는 사랑)
http://www.ofmkorea.org/1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