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설마 주님께서 생명 아닌 죽음을 내놓으시고
더 더욱이 축복 아닌 저주를 우리 앞에 내놓으실까?
사실 하느님께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주라는 것도 없으십니다.
빛이신 하느님께 어둠이 없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어둠이 나오지 않는데
우리에게 어둠이 있음은 우리에게 빛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빛이 없음은 하느님께서 빛을 거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로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생명과 축복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죽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죽음이 있음은
우리 존재가 생명에 잇닿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렇게만 하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대로 하면
축복을 받아 살게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이 바로 저주가 되어 죽게 됩니다.
우리의 저주는 축복을 거부해 받지 못함이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오늘 우리가 들은 신명기에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주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을”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인가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6번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 수치와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할 때의 “바라봄”은
라틴말로 “attendo”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저 단순한 봄이 아니라
‘향하여 봄’,
‘직면하여 봄’,
‘집중하고 정신 차려 봄’입니다.
다른 것에 기웃거리면서 흘깃 보는 것이 아님은 물론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그리고 직면하고 정면해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을 그렇게 보라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주님을 그렇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이 너무도 끔직하여 그 수난이 보기 싫고
그리고 보고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아예 안 보거나 마지못해 보는데,
그래서는 안 되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서 주님의 양들처럼 이 주님을 따라야 함을 얘기합니다.
주님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생명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그들의 수없는 불순명 만큼 도처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불순명의 징벌인 죽음의 불 뱀을 매달아달고
살려면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올려다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외면한 대가로 죽게 되었음을 깨달아 알았다면
늘 죽음을 직면함으로서 주님을 대면하라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십자가를 관상함도 이런 것이겠지요.
십자가를 더 자주 관상하는 사순시기여!
설마 주님께서 생명 아닌 죽음을 내놓으시고
더 더욱이 축복 아닌 저주를 우리 앞에 내놓으실까?
사실 하느님께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주라는 것도 없으십니다.
빛이신 하느님께 어둠이 없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어둠이 나오지 않는데
우리에게 어둠이 있음은 우리에게 빛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빛이 없음은 하느님께서 빛을 거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로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생명과 축복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죽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죽음이 있음은
우리 존재가 생명에 잇닿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렇게만 하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대로 하면
축복을 받아 살게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이 바로 저주가 되어 죽게 됩니다.
우리의 저주는 축복을 거부해 받지 못함이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오늘 우리가 들은 신명기에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주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을”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인가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6번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 수치와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할 때의 “바라봄”은
라틴말로 “attendo”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저 단순한 봄이 아니라
‘향하여 봄’,
‘직면하여 봄’,
‘집중하고 정신 차려 봄’입니다.
다른 것에 기웃거리면서 흘깃 보는 것이 아님은 물론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그리고 직면하고 정면해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을 그렇게 보라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주님을 그렇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이 너무도 끔직하여 그 수난이 보기 싫고
그리고 보고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아예 안 보거나 마지못해 보는데,
그래서는 안 되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서 주님의 양들처럼 이 주님을 따라야 함을 얘기합니다.
주님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생명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그들의 수없는 불순명 만큼 도처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불순명의 징벌인 죽음의 불 뱀을 매달아달고
살려면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올려다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외면한 대가로 죽게 되었음을 깨달아 알았다면
늘 죽음을 직면함으로서 주님을 대면하라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십자가를 관상함도 이런 것이겠지요.
십자가를 더 자주 관상하는 사순시기여!
사순절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가다듬어요~
은총의 사순절을 보내기위해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신부님~늘 감사드려요~^^
인간의 고난을 보시고 슬퍼하셨던 주님의 연민,
친히 고통을 담당하신 주님의 용기,
욕을 당하시되 욕하지않으신 주님의 온유하신 인내,
맡겨진 일을 끝까지 이루어내신 주님의 신실함,
주님의 단순성, 주님의 자기훈련, 주님의 평온함,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주님!
사순절을 지나는 저에게도 이 모든 면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를수 있는 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