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두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과 <슬퍼하며>입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저의 느낌도 두 가지였습니다.
<얼치기>와 <양다리 걸치기>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이 십계명
실천은 다 했다고 답하며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다시 묻자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어찌어찌 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요즘 우리말에 <2% 부족하다>는 말이 유행인데
이 말은 완전함에 딱 2%가 부족하다는 뜻이며.
아주 조금의 부족 때문에 완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뜻이지요.
이 청년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이 복음을 가지고 강의할 때마다
이 청년이 참으로 딱하다는 뜻으로 많이 얘기하곤 하였기에 이번에는
제가 딱하다고 생각하는 이 청년과 저를 비교해봤는데 이 청년이 2%
부족하다면 저는 그보다 훨씬 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성이 이 청년보다 부족하고,
십계명을 이 청년은 잘 지켰다고 자신있게 말하는데 저는 그럴 수 없고,
가진 것을 다 팔지도 이웃과 잘 나누지도 않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도 한 때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고,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도 했으며,
십계명을 전혀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을 팔아 이웃과 나누는 것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부족했고 하긴 했지만 얼치기로 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과 비교할 때 이런 것들보다 더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저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점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가 많은 재산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슬펐나 본데 저는 슬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 슬퍼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더니 저는 비록 얼치기일지라도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고,
그래서 목표를 향해 줄달음쳤다고 한 바오로 사도와 달리
주님을 따르면서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천천히 따르고,
어떤 때는 멈추기도 하고 낙오되기도 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Sequela Chisti와 Imitatio Christi, 곧
그리스도를 따르기와 그리스도를 닮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든 닮기 위해서든
주님 바라보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고,
강도와 차원을 높여가면서 바라보기를 해야 합니다.
클라라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대의 정배를 닮기를 갈망하면서, 그분을 응시하고(Intuere),
그분을 깊이 생각하고(Consedere), 그분을 관상하십시오(Contemplare)."
이러해야 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오늘 부자 청년처럼 가진 것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주님을 따라 나서긴 했는데 주님을 따라가다가 주막집에 들러 쉬다가
놀다가 보니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주님을 놓치고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러고도 슬퍼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부자 청년과 달리
저의 슬픔은 '양다리 걸치기'와 '얼치기'의 슬픔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선행만으로는 부족하다.)
http://www.ofmkorea.org/255055
18년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사랑이 완전하려면)
http://www.ofmkorea.org/138966
15년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나의 선행이 아닌 주님을 따름으로)
http://www.ofmkorea.org/81350
10년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완전해지려거든)
http://www.ofmkorea.org/4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