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이라는 덫
신앙과 영적인 성숙은 희생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는 선택과 결단에서 온다.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포함시키는 능력이다.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타인의 결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들의 결핍을 말없이 메워주려는 사랑에 찬 의지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행하는 데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마태12,7)
희생은 본래 좋은 것이었지만 본래의 취지가 사라진 것은
하고 싶지 않지만 너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 없이 하면서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외부의 조건 때문에 하는 것이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희생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관계를 망친다.
자신을 다른 사람 위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희생이라는 명제를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신을 높인다.
희생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불평과 불만이 많고 관계가 어렵다.
더 많은 희생이 더 많은 자격을 얻는 기회로 만들기 때문이며
명령하고 통제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생을 희생하면서 살아왔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반복해서 희생을 열거하며
보상을 받기를 기대하고 산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이 관계를 회복하게 한적은 거의 없다.
이상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돌보심이
오직 인간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느님의 관심을 자신에게만 국한 시켜 버림으로 하느님을 가두어 버린다.
자신이 치러야 했던 희생에 하느님을 가두어버리고
자신이 만든 선함과 거룩함으로 통제를 시작한다.
그러나 온갖 만물 속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관대하신 하느님
피조물 안에 숨겨두신 창조적 현존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모든 존엄성과 가치의 내적인 원천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존엄성은 가치 있는 것들에게만 겨우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존엄성은 만물의 본성과 존재 자체에 들어있는 가치의 기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피조물,
온 우주와 지구와 세상 모든 이들 안에서 발견해야 할 가치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스스로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였다.
죄의 댓가를 치루기 위해 마지못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사랑은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자발성이 없는 사랑은 가짜다.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목적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며
위로부터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이다.
생명의 에너지를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살리기 위해 내어놓는 일이다.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 산다.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나를 송두리째 내어놓는 응답이며 결단이다.
희생을 사랑으로 만들어 통제했던 일을 용서를 청하고
그러한 이들을 용서하는 일이며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일생을 희생하면서 살아왔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시작되는 미래를 위해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복된 이들이다.
회개는 그렇게 시작되는 믿는이들의 삶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다.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열리기 때문이다.
희생이라는 덫
거기엔 사랑이 없다.
2020년 9월 1일
피조물을 위한 기도의 날에
이기남 마르첼리노마리아 형제 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