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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1608- 1614): 엘 그레고 ( El Greco :1541- 1614)

by 이종한요한 posted Sep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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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Greco - The Vision of Saint John.jpg

제목: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1608- 1614)

작가: 엘 그레고 ( El Greco :1541- 1614)

크기: 켐퍼스 유채 224.8- 199.4cm

소재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말세다! 말세! 이 말은 사람들이 너무나 황당한 일을 당할 때 그리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상식 이하의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황당한 심사를 표현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요즘 우리는 참으로 이 말이 실감하고 있는 현실을 살고 있다. 기후 변동에 대한 위기는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한 감회이지만 코로나로 이어지는 고통은 어느 개인도 전적으로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처지에서 온전한 책임으로 당하는 것이기에 이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참 말세 현상이란 한탄이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 걷잡을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을 주는 요즘 현상은 이 어떤 종교인들의 집회에서 시작되었고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은 무지렁이 수준의 무지몽매한 신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자칭일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면서 허탈한 감회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제도는 어떤 것이던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부패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인간 자신이 부패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부패의 가능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은 사실이나 부패 중 가장 심각하고 독을 품는 부패는 종교의 부패이며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종교 부패가 나라 전체에 끼치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있다.

 

어느 종교이던 중생제도의 차원에서 사람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기본 사명이지만 종교가 잘못되면 인간 삶의 질을 사정없이 파괴한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볼 수 있다.

 

     요즘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제도적인 교회인 것의 좋은 면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우리 교회라고 열심을 가장한 광신이 저런 교회처럼 없으라는 법이 없는 것이고 보면 참으로 우리 교회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우리 가톨릭 교회도 초세기를 제외한 중세기에 교회가 권력을 잡으면서 고위 성직자로 시작해서 교회 안에 부패가 확산되었는데 이때 마다 응급 처방으로 수혈된 것이지 부패와 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삶을 살았던 수도자들이었다.

 

9세기부터 이미 교황청과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는 대단한 수준이었으나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시작한 클루니 수도원 운동이나 베네딕도의 정신을 더 완벽히 살고자 하는 시토회원들에 의해 교회가 정화되었고 13세기부터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가 시작한 탁발 수도자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다가 탁발 수도회 역시 부패했을 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교회는 분열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아우구스티노 수도자 출신으로 열심하고 경건히 살다가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고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탄식을 하게 된다.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더 사악해진다.”

 


     오늘 우리 사회는 종교가 국민 전체에게 건강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어떤 의미의 중생을 제도하는 집단이 아니라 중생에게 고통을 주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작가의 예술가로서의 인생 경력은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화려하다. 당시 베네치아 공국의 속주였던 오늘 그리스의 크레타에서 태어나서 역사깊은 이 도시에서 비쟌틴 화풍의 이콘을 공부했다. 이렇게 동방의 성화를 익히다가 26세 쯤 유럽 굴지의 르네상스 예술의 도시인 베네치아에 와서 화려한 색체를 구가하던 베네치아 화풍을 익힌 후 다시 로마로 갔다.

 

당시 로마 역시 교황의 후원을 받던 르네상스와 바로크가 겹치던 곳이기에 최고의 기교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토대로 원근법과 세밀한 데생이 기본인 서유럽 화풍을 습득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그 후 그는 스페인의 톨레도에 도착해서 그의 일생을 작품 활동에 보낸다. 그는 톨레도에 도착해서 전혀 자신의 배움이나 견문과 다른 새로운 자기만의 화풍을 창출했다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가장 좋은 것을 붙들어라는 정신을 따라 그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고 이것은 당시 마틴 루터로 시작된 개신교 확산을 반종교개혁으로 철저히 봉쇄하면서 대단히 전통적인 스페인 교회에 신비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새로운 화풍이 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말기 작품인데 왜 묵시록에 대한 것을 언급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침투되고 있는 개신교 영향에 대한 방어적 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당시 스페인 사회는 말틴 루터에 대해 무지에 가까운 편견과 오해를 지니고 있었다. 마틴 루터를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이나 마귀로 선전하는 가톨릭 교회의 일방적인 주장을 믿고 개신교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말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죽 했으면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성녀도 저서에서 마틴 루터에 대해 교회를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이단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도 확실하다.

 

작가는 그 나름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에 대한 대단한 애정이 있었기에 이런 상황에 대한 무지 상태가 교회에 대한 편협한 사랑이 종교개혁에 대한 불신감으로 작용될 수도 있었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성서 내용을 그린 것이다

 

어린 양이 다섯 번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그러자 그들 각자에게 희고 긴 겉옷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가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 요한 묵시록 6: 9- 11)

 

왼쪽 전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신체 모습을 확대한 사도 요한이 황홀경에 빠진 모습으로 팔을 한껏 펼친 채로 하늘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그 맞은편에는 두 편으로 갈라진 군상이 있는데 , 셋은 남성으로 오른편에 넷은 두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으로 왼편에 있다.

 

하늘에서 천사가 구원 약속으로 표시로 선사하는 흰 천이 드리워 있다. 그러나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밝은 노랑 빛 천 아래 있으며 왼쪽의 남성들을 초록빛 천 아래 있어 이들이 절규하는 모습에서서 절망의 그림자 보다 희망과 개선의 분위기가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가 되기 이전 나체의 표현은 대단히 조심스러웠고 성화에서는 더욱이 금기사항이었으나, 작가는 요한을 제외한 전체 7명을 나체로 표현한 것은 그들이 무덤에서 부활한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들의 영혼이 순결한 사람임을 나체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성서는 이런 절규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 장면을 작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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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색적인 빨강 노랑 초록이 어울러져 있는 군상들의 모습은 고통에 절규하거나 탄식하는 모습이 아닌 하늘로부터 내릴 큰 희망과 성공을 바라보며 흥겨워하는 모습이다. 전체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모습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니라 밝은 미래를 회상하며 춤추고 있는 무용수 같은 모습들이다.

 

보통 종교화는 불변의 진리를 표현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동적 표현 보다 정적인 표현을 더 강조하는 면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묵시록 전체의 드라마를 함축 표현하는 것이다. 묵시록은 전반부엔 감당할 수 없는 악의 힘에 의해 선이 위축되고 멸망의 위험에 처하는 고통을 전하고 있다. 세상엔 항상 옳은 것 보다 옳지 못한 것이 더 뚜렷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힘을 키워 선을 박살내는 것처럼 묵시록 저자가 제시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순간에 작가는 사탄 집단의 조종으로 가능한 일시적 승리에 실망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하느님의 선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믿고 일시적 악의 승리에 민감하지 말 것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시편 저자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중요한 사상이다.

 

악인들이 가는 길이 복스럽다 하여 시새우지 말라’ (최민순 시편 인용 36,7)

 

작가는 걷잡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선의 승리를 굳게 믿기에 내일의 승리를 미리 믿으며 기뻐하는 의인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하늘의 구름은 암울한 빛을 던지고 있으나 이 역시 고정된 상태가 아닌 선의 승리를 향해 힘찬 변화의 과정처럼 파도처럼 흔들리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더 밝은 세계, 선의 영광이 정착된 세상을 향해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크리스챤들에게 있어 준주성범과 같은 영향력이 있는 개신교 작가인 죤 번연(John Bunyan: 1628- 1688)이 쓴 천로역정은 박해받는 자기 처지에서의 경험을 묵시록과 같은 여정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밝은 색깔과 흰 구름 창백한 벌거벗은 순교자들의 얼굴 빛갈을 적절히 조화시켜 주님을 위해 고통을 받고 있는 처지에 이미 영광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치 성서의 말씀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8,18)의 말씀을 시각화하고 있다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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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주인공인 사도 요한은 묵시록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묵시록 1,1).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묵시록 1,2).

 

사도 요한은 주님이 알리시는 계시를 알리려고 왼편에 거대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다. 오른편의 사람들은 주님을 믿다가 순교한 사람들로서 이들이 겪은 박해의 의미를 알기 위해 몸부림 하고 있다. 이들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이것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하늘을 향해 절규의 몸짓을 하고 있으며 사도 요한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사명을 띄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순교자들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그의 엄청나게 긴 상체는 하느님을 향한 그의 염원이 너무도 간절하고 절박함을 알리고 있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무를을 꿇은 자세로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고 있다.

 

요한의 밑에는 붉은 천이 있다. 이것은 전체 색깔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정돈되지 않고 엉크러진 모양은 요한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시련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어려움 속에서도 흰빛이 주는 기쁨과 희망이 있다.

 

작가는 묵시록 6장에 나타나고 있는 순교자들의 시련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엄청난 섭리와 보호가 숨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당시 예술가로서 최고의 교육과 견문을 넓힌 후 톨레토에 정착해서 일생을 살면서 그는 대부분의 성화와 저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기의 화풍을 더 정착시켰으며 르네상스 이후 마네리즘(Manerism)이라는 화풍을 창출했다.

 

색체 처리믈 과거에 상상할 수 없이 과감하게 하고 신체를 길게 늘어트림으로서 르네상스가 강조하던 비례와 균형과 대조되는 새로운 미를 창출했다.

 

그러나 그가 시작한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잊어지고 외면 되면서 400년을 지나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당대에서는 실패한 화가였고 특히 그는 스페인 왕으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전통적 옹호를 하던 필립페 2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화풍을 탐탁지 않게 여긴 왕은 그를 외면했기에 그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실망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당대 스페인 구왕도였던 톨레도의 대표 화가로서 자리매김을 했으며 당시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삼위일체 수도회 총장이며 명망있던 시인으로서 작가의 예언적 표현의 몰이해를 잘 알고 있던 호르텐시오 파라비치로 부터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받았다

 

크레타는 엘 그레코에게 생명을 부여했고,
톨레토는 그에게 붓을 선사했다

 

자기의 작품성이 이해받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그의 작품성을 이해하고 격려해준 호르텐시오를 위해 보은의 마음으로 그려준 초상화는 걸작의 초상화로 남아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그의 화풍은 400년 후 입체주의(Cubism)에 의해 재생되었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작가의 화풍을 십분 활용해서 자기의 출세작인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것은 피카소를 일류 화가의 반열에 들게 하는 대표작이 되었다.

 

작가는 크레타 베네치아 로마라는 서로 이질적인 예술 전통을 수용해서 전혀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면서 인정과 몰이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아오다가 피카소에 의해 그의 화풍이 입체주의란 현대 화풍으로 재탄생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우면서도 대견한 일이다.

 

어떤 크리스챤 종파가 만든 상식 이하의 문제로 생각있는 종교인들은 수치심을 일반 사회인들은 종교의 위선과 이기심에 대해 혐오감과 분노를 느끼는 즈음 이 작가가 말세 현상에 대해 제시한 희망은 우리의 수치심과 분노 혐오감을 승화시킬 수 있는 시기적절한 묵상자료로 볼 수 있다.

 

시편의 다음 구절은 우리가 겪고 있는 말세적 탄식과 분노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 힘 우리 숨는 곳, 어려운 고비마다 우릴 구해 주셨기에
흔들림이 없어라 항상 굳굳하여라
“ (시편 45,2-3)

 피카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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