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에너지가 흐르는 유역에는 네가 산다.
사랑은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먼저 다가가는 사랑은 매력이 있다.
그것이 사랑의 흐름을 시작하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실천적 사랑에는 매력이 있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먼저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월감과 통제력을 포기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하느님께서 버렸다고 했던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먼저 다가가서 포기했던 희망의 씨에 물을 주었다.
우리가 참으로 사랑 안에 있을 때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과 연합한다.
사랑의 중심에는 결단하는 것과 연관되지만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과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되돌려 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은 채
기꺼이 내어주려는 교환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생명의 에너지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생명의 에너지가 나에게서 너에게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격적 사랑은 관계적 사랑을 배우는 학교다.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인간을 사랑하기 어렵다.
반면에 인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어렵다.
이 둘은 언제나 상호 교환적이다.
사랑은 너에게 창조적이고 희망에 찬 미래를 열어 준다.
선으로 악을 허락하며 조화를 만들어 낸다.
사랑은 물처럼 쉬지 않고 아래로 흐르며 모든 장애물과 맞서지 않고 돌아서 간다.
높은 곳을 추구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향한다.
내려놓고 내려가는 아름다움,
놓아주고 허용하는 아름다움이 관계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실천이다.
내려놓고 내려가고 놓아주고 허용하는 가난과 겸손이
잘못과 실수와 범죄에 대한 처벌이나 비난에서 벗어나도록 풀어주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 주는 해방의 기쁜 소식이 거기서 발생한다.
용서하는 영혼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용서가 없다면 반복되는 과거 속에 살게 한다.
옛이야기를 반복하며 상처만 기억되고 피해의식만 늘어갈 뿐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꾸는 사람,
측은한 마음으로 돌보시는 자비롭고 넉넉한 품 안에서 사는 사람은
처벌을 원하지 않고 경솔하게 판단을 하지 않으며
앙갚음하려는 기억과 상처의 흔적을 지우는 사람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잘못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미래를 창조하신다.
그분께서는 잘못을 제거하거나 처벌하지 않으시고 변화를 위해 사용하신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과 죄의 어두움의 흔적을 지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산다.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다면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흔적들을 지고 가지 않으면
우리의 교만과 자만심은 고개를 들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겸손하게 살아갈 수 없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 주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관계들을 용서하며 변화로 이끈다.
이 변화는 나로부터 너에게로 흘러간다.
생명의 에너지가 흐르는 유역에는 언제나 네가 산다.
변화의 풍요는 네 안에서 일어나지만 기쁨은 주변으로 흘러간다.
사랑은 그렇게 물처럼 흐른다.
흐름을 막지만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의 현재는 어디서나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