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예수님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다.”
교회란 하느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요.
그런데 모임이란 말은 흩어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모인다는 것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니
모임이란 흩어짐과 흩어져 있음을 전제 또는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흩어진 사람들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모으려면
왜 흩어졌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고,
왜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찾아서 떠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유익을 찾지 않고
세상이 주는 이익을 찾아서 떠난 것입니다.
영적인 유익이 세상의 이익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 데에 교회가 실패한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을 영적인 유익보다 더 찾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영적인 유익을 주지 못하는 교회도 문제입니다.
성당 가서 얻는 것은 별로 없고 뺏기기만 하니
시간 뺏기고 돈 뺏기기 싫어서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영적인 유익을 주는 것은 포기하고
그래도 사람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상의 이익을 주고받는 장바닥이 되어버렸습니다.
둘째로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만족을 주는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찾아 떠나간 것입니다.
교회가 그 부질없는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것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만족을
성당에서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갈라져 나간 것입니다.
다름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배움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실패하고
다름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하고
다른 여럿을 하나로 만드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마저 이 다름을 극복하지 못하여 갈라져있습니다.
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기 만족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기 생각, 주장, 종교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버려야 할 자기는 “자기만”의 “자기”이지
“우리”의 “자기”는 아닙니다.
“자기”없이 “우리”도 없고
“우리”는 각각의 “자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나의 하느님이요 너의 하느님인, 우리의 하느님이시지
나만의 하느님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하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합니다.
제가 북한 일을 하며
모임의 이름을 “한우리”로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진정 공동의 아버지로 고백할 때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다.”
교회란 하느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요.
그런데 모임이란 말은 흩어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모인다는 것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니
모임이란 흩어짐과 흩어져 있음을 전제 또는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흩어진 사람들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모으려면
왜 흩어졌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고,
왜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찾아서 떠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유익을 찾지 않고
세상이 주는 이익을 찾아서 떠난 것입니다.
영적인 유익이 세상의 이익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 데에 교회가 실패한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을 영적인 유익보다 더 찾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영적인 유익을 주지 못하는 교회도 문제입니다.
성당 가서 얻는 것은 별로 없고 뺏기기만 하니
시간 뺏기고 돈 뺏기기 싫어서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영적인 유익을 주는 것은 포기하고
그래도 사람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상의 이익을 주고받는 장바닥이 되어버렸습니다.
둘째로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만족을 주는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찾아 떠나간 것입니다.
교회가 그 부질없는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것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만족을
성당에서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갈라져 나간 것입니다.
다름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배움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실패하고
다름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하고
다른 여럿을 하나로 만드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마저 이 다름을 극복하지 못하여 갈라져있습니다.
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기 만족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기 생각, 주장, 종교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버려야 할 자기는 “자기만”의 “자기”이지
“우리”의 “자기”는 아닙니다.
“자기”없이 “우리”도 없고
“우리”는 각각의 “자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나의 하느님이요 너의 하느님인, 우리의 하느님이시지
나만의 하느님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하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합니다.
제가 북한 일을 하며
모임의 이름을 “한우리”로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진정 공동의 아버지로 고백할 때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기적을 만듭니다.
죽은 듯이 있던 나뭇가지에서
푸르름의 신비를 바라 봅니다.
너와 내가 우리로써 하나가 될 때처럼,
기쁘고 행복할 때가 있을까,
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하리라 생각 되요.
순수한 마음일 때는요,
그 순수함은 너와 나 사이에 성령이신
사랑이 존재할 때이고
그럴 때만이 나는 나로써,
너는 너로써, 서로에게 속해지고
용해되어 하나가 될 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평화의 나라,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싶고,
모든 이의 마음 깊은 곳에 그리움으로
자리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류의 현실,
그 한 가운데 제 자신도 자리하고 있다는,
연민을 느끼는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