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자비가 육화되는 땅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요한 4, 11)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응답은
수직적인 사랑을 받은 내가 수평적인 사랑으로 응답하라는 이야기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응답이다.
사랑이 사랑을 낳고
선이 선을 낳고
자비가 자비를 낳은 이 신비는 육화의 신비다.
내 안에 잉태된 말씀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취약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 동정녀를 통한 탄생을 문자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으로 만들거나
성모님을 통하여 바치는 기도와 희생과 예물들을 통해
현세적인 복을 구하는 믿음은
육화를 부인하는 무모한 영성과
하느님 나라를 미래의 것으로 만드는 영성으로 만들고
죄에 따른 처벌을 강조하여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무엇인가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만든다.
“성모상 밑에 여러분의 소원을 써서 넣으면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성모상을 만들어 세울 때 이렇게 말하는 어떤 사목자의 말을 듣고
봉헌을 위한 기도에 동참하고 나의 소원을 써서 주면
대신해서 그렇게 해주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자매가 나에게 보여준 간절한 사랑의 표시였다.
잉태된 말씀이 행동하는 자비로 육화되는 영성이 아닌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영성이 될 때
이러한 영성은 통제를 위한 명분이 되고 만다.
그것으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하느님은 육화되지 않은 채 인간이 만든 틀에 갇혀 계시기 때문이다.
공현의 신비는 육화의 신비다.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행동하는 자비가 있는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자비가 육화되는 땅은 너의 마음이다.
너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 땅을 찾아라,
나는 나의 인간적이며 일상적인 것들에서
사물의 깊이로 들어가 주님의 영을 발견하려고
점점 죽어가는 몸의 변화를 느끼면서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마음의 방향을 살펴보고
주변의 관계 속에서 전혀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려고
그리스도 예수께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내가 했던 과거의 결정들을 살펴보고 그 결정들이 만든 현재의 나를 바라보고
미래의 나는 지금 선택하고 내리는 결정들에 달려있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서
하느님의 통치에 나의 의지를 내어드리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자신 속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면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밖으로 나갈 수 있고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만이 위로 향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코로나의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
생명의 에너지가 고갈된 죽음의 바다에서
단절로 치닫는 파국의 관계에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 6,50)
용기를 내어 네 속으로 들어가라
너의 허물과 죄와 어둠을 뚫고 들어가
거기에서 너를 돌보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라
두려워하지 말고 관계 속으로 들어가라
행동하는 자비가 육화되는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홍해를 건너던 백성들은 안전한 땅을 밟고 건넜으나
예수께서는 불안전한 물 위를 걸어 나에게 다가오셨다.
불안전하고 위험천만한 그릇인 나에게 당신의 보화를 주시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