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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둔갑하는 이념의 뿌리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Feb 0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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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둔갑하는 이념의 뿌리

 

인과응보가 만들어내는 이념들은

신앙의 영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념은 한쪽만을 강조하고 다른 쪽은 무시해버리거나

칭찬과 욕설의 이중성을 띠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념이 신앙처럼 둔갑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매우 선하고 신앙적인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념을 기반으로 자기가 만든 틀과 원칙들은

율법적인 잣대와 저울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그것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르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러 가지 직무로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하느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신앙과 이념을 혼동하는 데서 나온다.

교회에 대한 봉사가 복음의 기반이 아닌 이념의 기반이 될 때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과는 거리가 먼 광신의 형태로 전락할 수 있다.

가족을 돌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매일 교회에 출근하는 신자들,

사목자들이 부탁한다는 이유로 자신은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이 한다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몇 개씩 맡아서 하는 봉사,

교구나 본당, 수도회 안에서의 봉사 직무도

직무의 크고 작음에 따라 하느님께 충성하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믿음과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도와 신심의 영역에서도 그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바치는 많은 양의 기도와 제물과 재능과 희생을 바치는 행위가

많이 바치면 많이 받을 것이라는 인과응보적인 이념의 기반 위에서 행하고 있다면,

또한 하느님은 거기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이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에 대한 봉사라는 명분으로 하는 그러한 일들은

하느님께 충성하는 일이 아닐뿐더러

복음의 예수께서 실천하셨던 삶을 따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만든 인과응보적 정의관에 갇혀 계실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인과응보적인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라기보다 사람을 조종하려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조종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반면에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

남보다 더 도덕적이고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키고 많은 것을 바쳐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까지도 조종하려 한다.

그들이 하는 기도의 내용은 부탁을 넘어 통제의 영역에 가깝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곳에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사라진 관계는 통제만 남고

통제만 남은 곳엔 지옥이라 부르는 느낌만 남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남을 조종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섣부르게 위로하지도 않는다.

다만 함께 울어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운다는 것은 통제하려는 것과 전혀 다른 행동 방식이다.

사랑은 통제하지 않는다. 다만 협력을 구할 뿐이다.

 

무엇으로도 묶여있지 않는 내적 가난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고

자유가 있는 곳에서 창조적인 생명의 에너지가 나오고

생명의 에너지가 너를 자유롭게 하는 곳에

치유가 있고, 해방이 있고,

하느님의 함께 하심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있다.

그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신앙으로 둔갑한 인과응보적 이념이 만든 틀에서는 그러한 자유도 없고 기쁨과 즐거움도 없다.

다만 해야 할 숙제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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