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자유를 관계의 자유로
믿음은 물질적인 세계 속에 살면서
물질적인 세계관에 집착하지 않는 가난이다.
가난이 주는 자유를 누려본 사람은 덧셈보다 뺄셈을 좋아한다.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
하느님과 연결된 자유는 그렇게 행복한 현재로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항상 너를 향해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마태 25)으로 현존하시는 분이시며,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루가17,2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너와의 관계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너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세계관을 영적인 세계관으로 둔갑시키는 사람은
자아도취의 그물에 걸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고
스스로 연민에 빠져 거룩한 척하지만 자유가 없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비교와 경쟁과 타인에 대한 비난 속에서 늘 불안하고
물리쳐야 할 원수와 해결해야 할 숙제가 항상 남아있기 때문이다.
흔히 영적인 자만심에 갇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살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강요하고 자신의 행동을 따르라고 자꾸만 재촉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괴롭히는 사람들은 영적인 삶과 믿음에 있어서
각자가 자기 몫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보다 현실과 타협하라고 부추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가르치려고만 한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광적인 거룩함으로 포장하고
성실함과 선한 의도까지 내보이기 때문에 그들을 방어하기가 어렵다.
의도가 옳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유는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고 상대방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친구들이라 하더라도 결별해야 한다.
어떻게 말할지를 아는 것보다,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남에게 해답을 제시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선입견과 편견에 치우쳐 듣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할 때,
상대방을 더 큰 곤경에 빠트린다.
이것은 폭력이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저지르는 폭력,
예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고 관심을 보이게 되면
놀랍게도 우리가 가졌던 문제들이 사라진다.
누군가 나와 동반하고 부축의 손길을 느낄 때,
나의 짐을 함께 져준다고 느낄 때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이해해주는 것이다.
관계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해,
이해를 바탕으로 너의 필요성을 채우기 위해
부축하는 마음으로 하는 동반이야말로 기쁜 소식을 발생시키는 복음이다.
자유가 관계를 구원하는 데 쓰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된다면
인류의 구원이라는 희망의 씨가 자랄 곳은 없다.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하신 일이 그리스도라는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신 일이다.
그분께서는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 “벗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당신을 따르라고 모범을 보여주셨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
연결된 자유가 묶인 자유를 해방하는 여기에 구원이라는 진정한 실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