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설립되고 확장되는 과정이 선명합니다.
처음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되는데
스테파노 사건으로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나 키프로스나
안티오키아에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는 유다인에게만 전했는데
그들 중에 일부가 안티오키아에 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고,
이곳 이방인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유다인들이었다면 여전히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어제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는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누군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말씀을
전해 받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말을 제가 왜 할까요?
그제 어떤 분과 이태석 신부님 얘기를 하다가 이태석 신부님보다 먼저
어쩌면 더 훌륭한 일을 하다가 돌아가신 평신도 선교사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범한 약사였던 분이 아프리카 선교를 꿈꿔 40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하여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갔는데 막상 아프리카에 가서 보니
소아과 치료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다시 한국에 와 전공의 공부를
한 뒤 계속 선교하다가 결국 전염병으로 아프리카에서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지금 이분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비록 아무도 없어도
이런 분이 사실 더 성인이라는 얘기가 그분 말씀의 골자입니다.
사실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사랑하는 사랑이
원수 사랑 못지 않게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사랑 때문에 사랑한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랑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오늘의 말씀 선포자를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못지않게 위대한 말씀 선포자임을 알아야 하고,
알뿐 아니라 나도 그런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능력도 없고 위대한 선포자가 못 될지라도
나도 선포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발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베드로든 바오로든 그리고 무명 선포자든 나든 결국
선포자로 쓰시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무명의 선포자는 자기가 전한 말씀이 받아들여지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자기로부터 말씀을 들은 이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리라는 것도 상상도 못했는데, 실은 그렇기에
그것이 성령께서 그를 도구 삼아 말씀을 선포하신 표시지요.
그러므로 나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나의 사랑도 업신여기지 말 것입니다.
나의 작은 선포도 성령의 역사 안에선 위대하니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증언력)
http://www.ofmkorea.org/346743
18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내 믿음은 어디까지?)
http://www.ofmkorea.org/121025
17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http://www.ofmkorea.org/103508
16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인간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하느님 역사)
http://www.ofmkorea.org/88746
15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나는 어떤 사람?)
http://www.ofmkorea.org/77567
13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사랑하는 이에게만 열리는 귀)
http://www.ofmkorea.org/52972
12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 2막, Korean Diaspora를)
http://www.ofmkorea.org/5798
11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나는 진정 주님의 양일까?)
http://www.ofmkorea.org/5077
09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착한 목자와 좋은 목자)
http://www.ofmkorea.org/2483
08년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알고, 믿고, 따르고)
http://www.ofmkorea.org/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