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양양 글라라 수녀원에 와 있습니다.
월요일 정동을 떠나면서 양양 수녀원 간다고 하니
형제들이 좋겠다고 합니다.
찜 통 더위에다 소음까지 말이 아닌 정동을 떠나니 좋겠기도 하지만
저는 떠나기도 꼼짝 하기도 싫었습니다.
여기저기 너무 분주히 떠도는 생활이 힘들고 지치기도 하고
공동체 형제들에게는 너무 나도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양 수녀원에 오니 이제는 서울 가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제들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움직이는 것이 싫어진다더니 제가 그렇습니다.
정주(定住)해야 편안(便安)하고 안정감(安定感)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안식(安息)이라면 모를까
변화와 움직임을 싫어한다면 죽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살아 있는 존재라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어제 당신 곁으로 열두 사도를 부르셨던 주님께서
오늘은 파견을 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그러니까 오라시는 주님께서 이제 가라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러시면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귀찮게 오라 가라 하느냐고 짜증을 내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냐고 화를 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말로만 주님이고 우리는 말로만 주님의 종입니다.
진정 주님의 종이라면 초대만 좋아하고 파견은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종을 초대한다는 것은 늘 파견을 위한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인이 놀자고 종을 부르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뭘 시키려고 부르지요.
이 당연한 이치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종으로서 억지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순명의 정신으로도 가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시키니까 사랑없이 억지로 가면 주님께서도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산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가 사명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 강의할 때 가끔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미아노 십자가로부터 프란치스코는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말입니다.
많은 3회원들이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답합니다.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점수로 치자면 50점 밖에 안 되는 답입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가 들은 것은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였기 때문입니다.
이 "가서"라는 말을 빼면
프란치스칸 영성과 삶에서 핵심을 빼먹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분도회의 定住 영성과 달리
순례자와 나그네의 영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우 동적인 영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감정으로서의 사랑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랑은 늘 동적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선 마음을 움직입니다.
좋아서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건
애처러워서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건
사랑의 대상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내 손자를 바라보는 마음이건
북한의 굶주리는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건 보고서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랑의 마음이 지극해지면 이제 몸이 움직입니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를 보면 저절로 볼에 손이 가듯
내 사랑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되면 도저히 가지 않을 수 없고
뭔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가 있지요.
이 배우가 사랑을 받는 것은 얼굴만 예뻐서가 아닙니다.
이 배우는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쁜 배우이고
마음이 사랑으로, 그것도 실천하는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입니다.
이 분은 온 생을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대장암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서 아프리카를 누볐지요.
그런 그가 생을 마감하기 1년 전
아들에게 유언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오늘 그 글을 여러분과 나누는 것으로 이 나누기를 끝맺겠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자 하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며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되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월요일 정동을 떠나면서 양양 수녀원 간다고 하니
형제들이 좋겠다고 합니다.
찜 통 더위에다 소음까지 말이 아닌 정동을 떠나니 좋겠기도 하지만
저는 떠나기도 꼼짝 하기도 싫었습니다.
여기저기 너무 분주히 떠도는 생활이 힘들고 지치기도 하고
공동체 형제들에게는 너무 나도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양 수녀원에 오니 이제는 서울 가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제들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움직이는 것이 싫어진다더니 제가 그렇습니다.
정주(定住)해야 편안(便安)하고 안정감(安定感)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안식(安息)이라면 모를까
변화와 움직임을 싫어한다면 죽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살아 있는 존재라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어제 당신 곁으로 열두 사도를 부르셨던 주님께서
오늘은 파견을 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그러니까 오라시는 주님께서 이제 가라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러시면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귀찮게 오라 가라 하느냐고 짜증을 내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냐고 화를 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말로만 주님이고 우리는 말로만 주님의 종입니다.
진정 주님의 종이라면 초대만 좋아하고 파견은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종을 초대한다는 것은 늘 파견을 위한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인이 놀자고 종을 부르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뭘 시키려고 부르지요.
이 당연한 이치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종으로서 억지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순명의 정신으로도 가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시키니까 사랑없이 억지로 가면 주님께서도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산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가 사명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 강의할 때 가끔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미아노 십자가로부터 프란치스코는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말입니다.
많은 3회원들이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답합니다.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점수로 치자면 50점 밖에 안 되는 답입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가 들은 것은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였기 때문입니다.
이 "가서"라는 말을 빼면
프란치스칸 영성과 삶에서 핵심을 빼먹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분도회의 定住 영성과 달리
순례자와 나그네의 영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우 동적인 영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감정으로서의 사랑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랑은 늘 동적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선 마음을 움직입니다.
좋아서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건
애처러워서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건
사랑의 대상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내 손자를 바라보는 마음이건
북한의 굶주리는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건 보고서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랑의 마음이 지극해지면 이제 몸이 움직입니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를 보면 저절로 볼에 손이 가듯
내 사랑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되면 도저히 가지 않을 수 없고
뭔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가 있지요.
이 배우가 사랑을 받는 것은 얼굴만 예뻐서가 아닙니다.
이 배우는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쁜 배우이고
마음이 사랑으로, 그것도 실천하는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입니다.
이 분은 온 생을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대장암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서 아프리카를 누볐지요.
그런 그가 생을 마감하기 1년 전
아들에게 유언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오늘 그 글을 여러분과 나누는 것으로 이 나누기를 끝맺겠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자 하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며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되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노는 것도 내가 놀고 싶을 때 놀아야지
그렇지 않을 때는 아이와 놀아 주는 것이 되겠다 싶어요.
우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영(성영)이 머무시는 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며 그 사랑이 내 마음 안에
머무신다는 증거는 내 사랑이 흘러가는 만큼만 일겁니다.
그러니 굳이 성령을 체험했다고 나팔을 불필요가 없는 거지요.
평화는 준다고 해서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평화를 누릴 만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네요.
오늘 하루 평화를 누릴 만한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