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거창한 주제인데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악의 경험이고
다시 악이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이요,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란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겪는 것인데
그렇기에 전에 싫어하고 거부하던 고통을 원하게 되면
그 고통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원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고통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싫어하고 거부하던 병고를
어떤 이유 때문에 내가 원한다면 병고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육신의 병고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고 다만 마음의 고통이 사라진 거지요.
다른 예를 든다면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 수술을 하는 경우
수술로 인한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마음의 고통이 없는 것이고,
마음은 오히려 기쁘고 희망에 부풀기까지 하겠지요.
왜냐면 그는 전에 자기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 고통이 심했는데
원하는 얼굴이 됨으로써 마음은 기쁘고 희망차게 되는 겁니다.
같은 예로 가난의 고통도 전에 그것을 거부하고 못 견뎌 할 때는
고통이 컸는데 프란치스칸 영성을 배워 가난을 진정 사랑하게 되면
가난 때문에 오히려 마음은 행복하지만 사는 것은 여전히 고달프겠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서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하심下心의 행복을 알아 스스로 낮아지고 섬기게 되면
높아지려고 하다가 낮아졌을 때의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화롭지요.
그러니 죄악이 아닌 한 원치 않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원하게만 되면 마음은 평화롭게 행복한데
관건은 어떻게 모든 것을 원하게 되느냐 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고통마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더 완벽한 것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 고통마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일컬어 라틴말로 Passio라고 하고 영어로 Passion이라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Passio가 Passio Christi 곧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당신이 원하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죽음 곧 사람들을 위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오늘 주님의 종의 노래인 이사야 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아버지의 뜻은 주님이 으스러지고 병고에 시달리며 수난하는 것인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에 고통을 당해도 흡족하고
덕분에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되니 더욱 흡족해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으스러지고 병고에 시달리는 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처럼 마음 흡족한 우리가 되라는 과제를
오늘 받아 안은 우리입니다.
(무거운 주님의 말씀)
http://www.ofmkorea.org/3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