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진보와 보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옛 것이 좋다고 하며 지키려는 것이 보수라면
새 것이 좋다고 하며 새 것을 실현하려는 것이 진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보면
나이 든 사람이 보수적이고 젊은 사람은 진보적이지요.
전에 양로원에서 봉사할 때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난 뒤 남은 것들을 정리를 하다보면
한 번 도 안 입은 새 옷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래서 유심히 보니 어르신들 대부분이 새 옷을 선물 받으면
받을 때는 좋아하고 기뻐하시지만
입는 것은 늘 입던 것을 입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끼다 똥 돼요’하며 입으시라고 해도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입던 옷이 편하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젊은이들은 한 옷을 계속 입으면 지루하고
옷이 많은데도 새 옷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 옷, 저 옷을 삽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옷이 별로 없어도
입던 옷 입느라 안 입는 옷이 있지만
젊은이들은 옷이 너무 많아 안 입는 옷이 많습니다.
아무튼 나이든 사람은
먹던 것,
입던 것,
하던 것,
가던 곳을 고집합니다.
그러면 나이 든 사람들은 왜 옛 것에 머물며 옛 것을 지키려 하고
젊은이는 새 것을 쫓고 시도할까요?
나이 든 사람도 젊었을 때는 새 것을 쫓았었지요.
새 것이 지금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기대와 희망을 가졌지만
막상 새 것을 손에 쥐어도 그게 그거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
나이 들어 이제는 오히려
새 것을 따라가는데 점점 힘만 부치고 번거로울 뿐입니다.
안주(安住)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편안(便安)함에 머물음, 이것이 안주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향상(向上), 더 나은 것에로 나아감의 멈춤입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입니다.
오늘 주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 하십니다.
새 부대는 알겠는데 새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단식재 규정을 지키는 문제로 시비가 생긴 앞의 얘기로 볼 때
구약의 율법 규정이 묵은 포도주라면
새 포도주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계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규정(規定)을 지키는 데서 안정감(安定感)을 얻고
거기에 安住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에로 나아가지 못 할 것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란 사랑의 감정에 머묾이 아니라
사랑이 재촉하는 실천입니다.
떠나라는 재촉,
버리라는 재촉,
죽으라는 재촉에 머뭇거리고 어기적거리지 않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인 새로운 계명, 즉 사랑을 즉시 실천에 옮기려는 정신,
이것이 새 부대가 아닌가 오늘 생각해봅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진보와 보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옛 것이 좋다고 하며 지키려는 것이 보수라면
새 것이 좋다고 하며 새 것을 실현하려는 것이 진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보면
나이 든 사람이 보수적이고 젊은 사람은 진보적이지요.
전에 양로원에서 봉사할 때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난 뒤 남은 것들을 정리를 하다보면
한 번 도 안 입은 새 옷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래서 유심히 보니 어르신들 대부분이 새 옷을 선물 받으면
받을 때는 좋아하고 기뻐하시지만
입는 것은 늘 입던 것을 입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끼다 똥 돼요’하며 입으시라고 해도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입던 옷이 편하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젊은이들은 한 옷을 계속 입으면 지루하고
옷이 많은데도 새 옷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 옷, 저 옷을 삽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옷이 별로 없어도
입던 옷 입느라 안 입는 옷이 있지만
젊은이들은 옷이 너무 많아 안 입는 옷이 많습니다.
아무튼 나이든 사람은
먹던 것,
입던 것,
하던 것,
가던 곳을 고집합니다.
그러면 나이 든 사람들은 왜 옛 것에 머물며 옛 것을 지키려 하고
젊은이는 새 것을 쫓고 시도할까요?
나이 든 사람도 젊었을 때는 새 것을 쫓았었지요.
새 것이 지금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기대와 희망을 가졌지만
막상 새 것을 손에 쥐어도 그게 그거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
나이 들어 이제는 오히려
새 것을 따라가는데 점점 힘만 부치고 번거로울 뿐입니다.
안주(安住)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편안(便安)함에 머물음, 이것이 안주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향상(向上), 더 나은 것에로 나아감의 멈춤입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입니다.
오늘 주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 하십니다.
새 부대는 알겠는데 새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단식재 규정을 지키는 문제로 시비가 생긴 앞의 얘기로 볼 때
구약의 율법 규정이 묵은 포도주라면
새 포도주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계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규정(規定)을 지키는 데서 안정감(安定感)을 얻고
거기에 安住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에로 나아가지 못 할 것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란 사랑의 감정에 머묾이 아니라
사랑이 재촉하는 실천입니다.
떠나라는 재촉,
버리라는 재촉,
죽으라는 재촉에 머뭇거리고 어기적거리지 않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인 새로운 계명, 즉 사랑을 즉시 실천에 옮기려는 정신,
이것이 새 부대가 아닌가 오늘 생각해봅니다.
머리속에 투터운 학식을 요하는것도 아니고
굳이 생각하자면 옛것과 새로운것이 잘 교집합 된
하느님의 말씀이자 내일위한 지침서 이시다
어느날 삼청동 인사동을 다녀오면 옛 풍경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쉬음 가득하다
우리는 인사동 견지동 길속에서 고전을 만났고
삼청동 뒷산을 거쳐 인왕산을 오르내리며
산딸기를 따 먹었며 詩을 읊었다
그런 아련한 추억은 그림자도
없을 정도로 세상은 바뀌어간다
옛날에 연연해 하는 마음을 이제는 새로운 모습과
마음으로찾아나서는 길을 바라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