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전교 주일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데 즉시 든 생각은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원하더라도 구원받도록 실제로 복음을 전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할까요?
실로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거나 줄어들고,
구원을 위해 선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참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다음달이면 위령성월인데 옛날에는 이 위령성월에
부모나 조상들을 위한 연미사 봉헌이 많았는데 요즘 점점 줄어들고,
평사시에도 부모를 위한 연미사보다 자녀들을 위한 생미사가 더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치사랑과 내리사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영혼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복을 더 바라는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두 겹의 문제가 같이 있습니다.
사랑이 영혼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과,
보편적인 사랑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협소한 자기와 가정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선포하는 사람이 되려면
선교사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데 선교사적인 사랑이란
나와 우리 가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뜻에서 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제가 선교사적인 사랑을 얘기하고 있지만
저도 미국에 살다가 오기 전까지 선교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제가 우리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생활이나 선교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복음이 우리나라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사실 10대 때는 복음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저 자신 안에 갇혔고
25살이 넘어서야 겨우 나를 벗어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저의 복음 선포가 아직 우리나라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생활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고,
특히 외국에서 우리민족을 보면서 북한의 복음화를 생각게 되었으며,
북한 복음화를 위해 일하다가 중국과 러시아, 일본으로 차츰 확장되었고,
이제는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 와 있는 이주민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국밥>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자주 자신 안에 갇히고,
자기 가족과 나라와 민족에 갇히는데
우리의 사랑이 모든 사람과 나라와 민족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나 독서나 전례 기도문을 보면
'하느님 백성', '모든 사람/만민', '모든 민족'과 같은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 또는 '나의'가 '모든'과 '하느님의'로 바뀌는 것이 선교사적 사랑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복음이 민족애 갇혀서는 안 되기에)
http://www.ofmkorea.org/383867
19년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의욕이 아니라 소명감으로 하는 선교)
http://www.ofmkorea.org/277239
17년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는 땅 밟기가 아니다.)
http://www.ofmkorea.org/112751
15년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행복한 사람이 사랑으로만할 수 있는 선교)
http://www.ofmkorea.org/83537
13년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나는 복음으로 행복한가?)
http://www.ofmkorea.org/56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