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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5주 목요일-허무와 친해지기

by 당쇠 posted Sep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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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오늘 저는 말씀 나누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고백성사를 보는 듯한 마음이기 때문이고
이런 고백을 하고나면 여려분이
전과 같이 저를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게 자주 엄습하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특히 올 해 들어와서 자주 드는 느낌은 서운함과 노여움입니다.
아주 별 거 아닌 것들에 서운하고 노여워합니다.
전에 같으면 지나칠 것들이 요즘은 다 눈에 들어오면서
서운해 하고 노여워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말씀 나누기에서 제가 한가위 인사를 했는데,
글을 읽은 많은 분들이 간단한 한가위 인사도 않습니다.
그것이 서운한데 전에는 서운하지 않았었습니다.
인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다른 분에게 인사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지요.
그런 제가 지금은 그런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가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강론에 전과 같은 신선함이 없다는 형제들의 말도 서운합니다.
형제들이 대 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농담이고
그런 얘기를 해도 그것을 제가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의 저는 그것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저의 강론에 신선함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전에는 그것이 진심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요즘은 별 거 아닌 말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 못합니다.
좋게 이해하면 작은 것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고 진지하게 대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강하게 드는 느낌은 허무감입니다.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
내가 한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느낌 등.

이런 얘기를 듣고 평소의 저를 아는 분들은 많이 놀라실 것입니다.
저도 이런 제가 요즘 매우 낯설고
덕분에 이런 저에 대한 내면 공부와 수련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 깨닫는 것은
이것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허무는 허무를 피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이니.
허무를 적어도 가치중립으로 놓고 껴안아야 하며,
허무를 앞에 놓고 “오, 나의 허무!”하며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허무를 나의 운명으로 껴안아야 하고
허무를 나의 본질로 껴안아야 합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다 뜻이 있으니
하느님을 만나는 장으로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허무이신 하느님이라고 전에 자주 제가 떠들어 댔는데,
이제 이 허무를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하느님으로 만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아직까지 허무는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머리로 아는 것처럼
허무가 사랑으로 느껴질 때까지
허무와 노닐며 친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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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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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홈페이지 지상 2010.09.24 08:24:39
    신부님, 이 코너를 즐겨 읽고 묵상하는 남쪽의 독자입니다.
    늘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신부님이 조금 어려움이 깍이고 편안하게 느껴져
    빙긋 웃었습니다. 말씀나누기가 조심스럽다고 고백할 만큼 속마음을 진솔하게
    보여주신 신부님이 오늘 아침 훨씬 더 멋있고 근사하게 생각됩니다. 신부님 화이팅입니다.
  • ?
    홈페이지 웃지요 2010.09.24 08:24:39
    꼿꼿하고 강인한 멋을 지니신 신부님께,

    지금은 연약함, 부드러움과 노닐며
    술익는 보름달 정취를 만끽하고 계시는 것을 보니
    꿈에도 잊힐 리 없는
    저의 고향가는 길이 다가옵니다.

    한 씨앗을 뿌리시고
    밝음과 어두움, 모든 것을 품고 배양시켜
    각 현존의 고유함을 깨우치게 하시고 일궈내시느라
    보이지않는 손길로
    햇빛과 비바람과 사랑을 한없이 쏟아부어주신 분,
    어느틈새 자라고 있는 어린 새싹 한 잎
    말없이 지켜보고 계실 그분 생각에
    이런저런 일들이 파묻혀 융합되는
    배양토가 익어가는 순간입니다.

    신부님, 늦은 인사입니다만 꾸벅^
    풍성한 한가위 보내셨지요?
    앞으로 고추잠자리 편에 자주 편지 올리겠습니다.
  • ?
    홈페이지 뭉게구름 2010.09.24 08:24:39
    당쇠 신부님 !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하시니 신부님도 조금씩 늙어?
    가시나봐요.세월이 흐르는 만큼 노여움도,서러움도 많이 쌓일 것 입니다.

    예전, 우리 외 할머니께서 오랫만에 친적이 오시면 서로 부등켜 앉고
    대성 통곡하시는 모습이 지금 눈에 선 합니다.
    물론 6,25 전쟁중에 1,4 후퇴 때 이북에서 사선을 넘어오신 외 할머니 친척이니 한(恨)도 많으시고 반가웁기도 하시고,오랫 만에 오신 핏 줄기를 원망도 하시는 눈물이었습니다.

    어차치 홀로 태어나서 홀로 이 세상을 하직 하고 하느님께로 가는 지상의 나그네 입니다. 나그네는 허무와 외로움,쓸쓸함이 그림자 처럼 따라 다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 하며 떳떳 하게 주님을 뵈올수 있는 제가 되어야 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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