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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수도원 이야기 (4)

by 이종한요한 posted Nov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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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수도원 이야기 (4)  -  이 아뽈리나리스 관구장


관구장으로서 임기를 끝낸 후 로마 총본부로 가서 양성 학문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으로 우리 회원들의 자질을 키운 후 프란치스칸 현존이 빈약한 극동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극동 지역의 총장 대리가 되어 일본에 부임했다.


일본 관구는 이미 16세기 스페인 폴투갈 선교사들이 진출해서 순교 성인들을 배출했을 만큼 긴 역사가 있는 곳이며, 더욱이 일차 대전이 끝난 후 바티칸은 아시아의 복음화의 거점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옮겨 일본을 복음화시키면 아시아 전체가 복음화 될 수 있다는 극히 세속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고 교황청은 온 세계 수도회에 고급 인력을 일본에 투입해서 고급 인력으로 융단 폭격을 했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때려 부수고, 청일 전쟁으로 중국을 이기는 것을 본 바티칸은 복음화에 있어서도 이 원칙이 적용되리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칸 역시 유럽과 북미의 여러 관구들이 한 것처럼 융탄 폭격 차원에서 일본으로 진출했다. 아폴리나리스가 일본에 왔을 때 일본은 전 세계어서 25개 관구에서 모인 178명의 형제들이 진출해서 선교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칸 행정의 약점은 많은 부분이 관구 중심이기에 중앙 집권적인 조직이 보일 수 있는 거시적 전체적인 일에 항상 제동이 걸리고 있는 상태에서 아폴리나리스는 근동 아시아 관구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선 일본 파견단들을 관구 조직 안에 통합하는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일본 선교 역사는 1540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상륙함으로 시작되었고 한때  40만명의 신자를 확보할 만큼 성장했다. 일본 순교사를 보면 1596 12 9일 일본의 절대 통치자인 타이코사마 는 26명의 그리스도교인을 체포하고 오사카에서 사형시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행동을 인정했다.


그들은 1597 2 5일 나가사키 외곽에 있는 니시자 언덕에서 순교했는데, 시성된 26명 중에 바오로 미키, 베드로 밥티스타와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 제1회 회원들, 17명의 제3회원들, 그리고 2명의 교리교사가 있었다즉 일본엔 이미 프란치스칸들이 순교를 할만큼 신앙 차원에서 정착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순교자들 중에 임진왜란으로 끌려간 한국인 포로 중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생겼다. 이들 중 다수는 한국의 귀족이나 양반 출신으로 비록 일본에서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프란치스꼬 재속 3회에 입회했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근 500년 동안 파견단 중심의 사고방식을 극복치 못해 파견단의 대표들이 좌지우지하는 시대착오적인 태도로 정식 관구를 출범시키지 못했다.


필리핀 역시 1577년 스페인 프란치스칸이 진출해서 시작된 것이고 인도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가 도착하시기 전에 이미 폴투칼에 의해 프란치스칸 선교사들이 도착했고 인도 고아에 있는 대성당은 하비에르가 아닌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봉헌된 것일 만큼 역사가 깊은 것이나 이런 나라의 프란치스칸들이 모두 500년이 지난 뒤에야 관구로 승격될 만큼 지지부진한 행정력에 묶여 있는 처지였다.


이런 현실적 제도적인 장애에 의해 아시아 프란치스칸 현존은 생명의 성장 차원이 아니라 연명의 차원으로  500여년을 이어온 처지였다아폴리나리스의 이런 예언적인 노력은 일본에서 격렬한 반대를 받아 그는 일본에서 발부칠 때 없는 상태가 되자 우리나라로 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실패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분노치 않고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우리나라에 총장 대리로 파견되었다. 아폴리나리스는 이 지리멸멸한 장애를 극복하고 효율적인 처신으로 프란치스칸 행정 역사에 활력을 불어 넣은 일이 한국에서 시작하셨다.


프란치스칸의 특성상 입으로는 형제 타령을 하지만 실재 행정에 있어선 자기 소속 관구의 유대를 최우선시하는 파견단( Foundation)의 성격을 띄고 있기에, 한 형제체로서의 관구를 형성할 수 없던 처지에 아폴리나리스가 부임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이 일본 선교사들과 회원들을 설득해서 일본에서 일하는 모든 형제들을 하나의 일본 관구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


그는 프란치스칸 행정 체제의 큰 약점이 관구 체제로 진출 몇 백년이 되고도 각 관구 파견단 수준에 머물면서 일본 관구를 만들지 못하는 일본의 현실을 고치기 위해 끈질기면서도 신중한 노력을 했으나 결국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으로 이동된 것이다.


오랫 동안 파견단 성격의 삶에 익숙했던 회원들이 개방으로 겪어야 하는 어려움과 일시의 혼란을 받아 들일 마음이 없었기에 아폴리나리스의 계획은 공연히 잘 살고 있는 곳에 평지 풍파를일으키는 것으로 오인되면서 일본에선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었고 파견지를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옮겼다.


아폴리나리스는 한국에 부임하면서 한국 프란치스칸들이 일본처럼 경직되기 전에 이 약점부터 고치기로 결심하고 조심스럽게 파견단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실패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도했던 이 복음적 계획이 한국에서는 큰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


이유는 시기적으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후라 교회론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데다 , 한국에 파견된 파견단들은 불모지와 같은 한국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한 처지에 파견단 차원의 고집 보다는 통합된 관구의 형성이 실재적으로도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관구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필수인 관구 체제가 정착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이룬 극적인 공적으로 볼 수 있다. 극동에서 일본이나 필립핀이 500년이 지나서도 독립을 하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모습이 극동 관구의 특성인 현실에서 그의 복음적 기반을 둔 현명한 처신과 설득을 통해 노력 한국 관구는  50년이 되기 전에 방인 형제들에게 행정권을 넘길 수 있는 혁신적인 성취를 이룰 수 수 있었다. 


그는 한국 관구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한국 교회 성직자, 주교단에도 대단한 신뢰를 받았다. 그의 혜안과 열린 태도를 알아본 성직자들은 그의 인격과 경험에 매료되어 장상 연합회 수준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셨다. 그분은 또한 당시 한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현명하게 처신함으로서 우리 수도회의 위상을 보이는데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셨다.


정확한 일자는 기억 못하겠으나 박정희 유신 시절 미국 카터 대통령이 방한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독제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느낀 미국 정부에 의해 주한 미국 철수설까지 거론되던 참으로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인권적 차원에 비중을 두는 카터 정부의 태도는 박정희를 위시해서 유신 인사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때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게 되었다. 국가를 위해 우리 정동 수도원이 꼭 필요하니 이것을 국가에 넘기면 그 댓가로 서울 좋은 지역의 땅을 많이 주고 그 자리에 수도원도 원하는 대로 지어 주겠다는 정중한 제안을 받았다.


물론 당시 우리 정동 수도원은 우리들의 사도직 수행에 너무 좋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당시 정부의 태도를 수용한다면 우리 수도회에는 상상도 못할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는 계기였다. 한마디로 "호박이 넝쿨채 굴러 떨어진" 호기 앞에 그분은 프란치스칸 정신과 새로운 시대 징표를 아울러 읽는 바른 태도를 보이셨다.


그분은 정부 측에 정중히 거절함으로 정부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후 정부에서 대안으로 제안했던 장소와 건물 하나가 러시아와 국교가 재개되면서 이것을 함부로 사용했던 우리 정부가 러시아 정부에 배상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러시아와 외교 관계가 단절될 때 그것을 정부가 수용해서 이상한 개신교 단체에 넘긴 처지였기에 러시아 정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정부 측에는 상당히 부담도 되었고 함부로 남의 대사관 부지를 엉뚱한 곳에 넘긴 우리 정부의 태도는 국가적 실책이 되어 이것을 보상하는데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었다 .


아뽈리나리스가 이것을 정중히 거절한 혜안은 우리 뿐만아니라 정부의 처신에 까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분의 이런 처신은 그후 사회 정의 차원에서 외부로 정의를 외친 우리 관구의 태도를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뽈리나리스의 처신은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에게 프란치스칸으로서 정의를 외침에 꼭 기억해아 할 좋은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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