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것이 주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노래합니다.
“주님, 모든 것이 주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주님의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주님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이 기도는 에스테르기 4장의 말씀이기도 한데
원수의 음모에 의해 에스테르 왕비와 유다 민족 모두가 죽게 될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르도카이가 바친 기도입니다.
인간의 불의에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기도가 바쳐졌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인간의 폭력과 음모만이 설쳐대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 같은 경우 말입니다.
독재 국가들이나 북한의 경우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들의 그 악랄한 폭력과 억압만을 보고 분노하지만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폭력과 억압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들과 북한 동포를 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믿는데
이들의 야만적 폭력에 하느님은 아무런 힘이 없으신 것인지,
우리는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억압 받는 자의 고통을 못 본 체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믿는데
이들의 야만적인 폭력에 하느님은 아무 관심도 없으신 것인지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그래서 희망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1독서의 하바꾹 예어자처럼 외치게 됩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정말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바꾹 예언서는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늦어지는 듯 하드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위대한 운동가들이나 정치가들도 이런 말을 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거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거나
“그래도 나는 진리가 승리하리라 믿는다.”고 얘기합니다.
이들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둠을 볼 때 이들은 새벽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억압을 볼 대 이들은 해방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불의의 승리를 볼 때 이들은 진리의 승리를 봅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인간을 볼 때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고
보통 사람들이 인간의 어둠을 볼 때 그들은 하느님의 빛을 볼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인간적으로 막다른 처지에 다다랐을 때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진정 밤이 깊고 어두워야 별이 초롱초롱하고
인간의 불이 꺼져야 하늘의 별빛이 빛나듯
인간적 절망의 순간에 하느님의 희망은 보이기 시작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비로소 진정 싹트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렇게 되리라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것이 주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노래합니다.
“주님, 모든 것이 주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주님의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주님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이 기도는 에스테르기 4장의 말씀이기도 한데
원수의 음모에 의해 에스테르 왕비와 유다 민족 모두가 죽게 될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르도카이가 바친 기도입니다.
인간의 불의에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기도가 바쳐졌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인간의 폭력과 음모만이 설쳐대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 같은 경우 말입니다.
독재 국가들이나 북한의 경우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들의 그 악랄한 폭력과 억압만을 보고 분노하지만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폭력과 억압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들과 북한 동포를 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믿는데
이들의 야만적 폭력에 하느님은 아무런 힘이 없으신 것인지,
우리는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억압 받는 자의 고통을 못 본 체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믿는데
이들의 야만적인 폭력에 하느님은 아무 관심도 없으신 것인지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그래서 희망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1독서의 하바꾹 예어자처럼 외치게 됩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정말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바꾹 예언서는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늦어지는 듯 하드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위대한 운동가들이나 정치가들도 이런 말을 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거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거나
“그래도 나는 진리가 승리하리라 믿는다.”고 얘기합니다.
이들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둠을 볼 때 이들은 새벽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억압을 볼 대 이들은 해방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불의의 승리를 볼 때 이들은 진리의 승리를 봅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인간을 볼 때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고
보통 사람들이 인간의 어둠을 볼 때 그들은 하느님의 빛을 볼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인간적으로 막다른 처지에 다다랐을 때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진정 밤이 깊고 어두워야 별이 초롱초롱하고
인간의 불이 꺼져야 하늘의 별빛이 빛나듯
인간적 절망의 순간에 하느님의 희망은 보이기 시작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비로소 진정 싹트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렇게 되리라 믿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신부님의 묵상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말에 힘이 있다"는 진리를,
새삼스러운것은 아니지만, 새삼스러운것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생명의 하느님이시라고 하는가 봅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청년과 일주일에 두번씩
나눔을 하는데 어제의 만남에서 전 그에게
"난 네가 네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내가 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순간,
제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그의 눈에도 이슬이 맺히는 걸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