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제물을 바치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빌라도가 죽인 일,
실로암 탑에 18명이 깔려 죽은 일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오늘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접하면 아무리 복음이라 해도 거슬리고
듣지 않은 것처럼 묵살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마치 “회개하지 않으면 너 중풍을 맞을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 급살을 맞을 것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회개가 꼭 이런 것입니까?
죽을까 두려워 회개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회개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회개입니까?
회개가 못된 행실이나 성격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라면
이렇게 무서운 하느님께 어떻게 돌아서는 회개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께서는 또 탕자의 비유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우리의 하느님은 누구나 다 다가가고 싶은 하느님입니다.
다가가기 두렵고 싫은 무서운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우리에게
괘씸한 놈 벌 받으라는 식으로 멸망케 하지는 않으실지라도
구원 전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악을 허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하느님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 자비와 용서만 믿고 막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잘못해도 내치지 못하는 부모의 약점을 이용하여
천방지축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몸을 함부로 굴리는 사람에게
언젠가는 몸의 이상이 오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그 시기의 문제일 뿐이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어지는 비유에서 이 점을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못내는 나무에게 1년이라는 유예의 기간을 주시고
주님은 오히려 정성을 더 들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차이가 없으면 그때 악이라는 카드를 쓰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인간의 죄와 악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매를 대서라도 고쳐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때 하느님도 마음 아파하시며 같이 눈물을 흘리시겠지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시험하여
주님의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물을 바치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빌라도가 죽인 일,
실로암 탑에 18명이 깔려 죽은 일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오늘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접하면 아무리 복음이라 해도 거슬리고
듣지 않은 것처럼 묵살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마치 “회개하지 않으면 너 중풍을 맞을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 급살을 맞을 것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회개가 꼭 이런 것입니까?
죽을까 두려워 회개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회개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회개입니까?
회개가 못된 행실이나 성격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라면
이렇게 무서운 하느님께 어떻게 돌아서는 회개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께서는 또 탕자의 비유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우리의 하느님은 누구나 다 다가가고 싶은 하느님입니다.
다가가기 두렵고 싫은 무서운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우리에게
괘씸한 놈 벌 받으라는 식으로 멸망케 하지는 않으실지라도
구원 전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악을 허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하느님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 자비와 용서만 믿고 막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잘못해도 내치지 못하는 부모의 약점을 이용하여
천방지축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몸을 함부로 굴리는 사람에게
언젠가는 몸의 이상이 오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그 시기의 문제일 뿐이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어지는 비유에서 이 점을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못내는 나무에게 1년이라는 유예의 기간을 주시고
주님은 오히려 정성을 더 들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차이가 없으면 그때 악이라는 카드를 쓰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인간의 죄와 악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매를 대서라도 고쳐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때 하느님도 마음 아파하시며 같이 눈물을 흘리시겠지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시험하여
주님의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끌어 주시니 감사 드릴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