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로부터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분의 집이 성당 건물로 알고
폐허가 된 성당들을 다미아노 성당서부터 시작해 셋이나 고쳤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집이 건물로서의 성당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것임을 깨달았지만
성당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성당(교회)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주셨기에
다음과 같은 말로 단순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는 전 세계에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래서 어디서건 성당이 보이면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으며
늘 빗자루를 갖고 다니며 더러운 성당이 있으면 청소를 했습니다.
그에겐 성당이 다른 어느 곳보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성당에서만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계신 곳이 어디든지 계신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범신론자로 여길 정도로
모든 것 안에 깃드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바위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바위를 조심조심 걸었고,
구더기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밟히지 않도록
길 가운데 있는 구더기를 길가로 옮겨놓았으며,
종이쪼가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종이쪼가리를 쓰레기로 방치하지 않고 고이 모셨습니다.
이런 피조물이 주님의 성전이 되었으니 우리 인간은
더더욱 주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선 자기가 성전이 되도록 자기 안에 성전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가슴에 성전을 마련하였다고 전기는 얘기합니다.
이는 성녀 글라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봉쇄를 동정녀의 봉쇄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영성에 따른 것이지요.
신부인 동정녀들은 신랑만을 위한 봉쇄구역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거기서 신랑과만 만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라라는 이런 봉쇄를 부정하지 않지만
봉쇄를 어머니의 봉쇄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자궁이라는 작은 봉쇄 안에 주님을 모심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는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자궁이 주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님의 성전이기에
그 어떤 속화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하나는 성전 정화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 파괴입니다.
우리에게도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주님을 만나는 안팎의 두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성당이 사교장이 되거나 장터가 되지 않도록
잡스런 것들을 다 치워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과 자궁이 하느님을 위한 성전이 되도록
하느님 아닌 것들을 품지 말아야 하고 있다면 치워야 합니다.
허물기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발생하지 않으면서
겉치레만 화려한 눈에 보이는 성당 건물은 헐어버리고
내 안에 성전을 세움으로
나를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우고,
나를 걸어가고 찾아가는 성전으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분의 집이 성당 건물로 알고
폐허가 된 성당들을 다미아노 성당서부터 시작해 셋이나 고쳤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집이 건물로서의 성당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것임을 깨달았지만
성당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성당(교회)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주셨기에
다음과 같은 말로 단순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는 전 세계에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래서 어디서건 성당이 보이면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으며
늘 빗자루를 갖고 다니며 더러운 성당이 있으면 청소를 했습니다.
그에겐 성당이 다른 어느 곳보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성당에서만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계신 곳이 어디든지 계신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범신론자로 여길 정도로
모든 것 안에 깃드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바위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바위를 조심조심 걸었고,
구더기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밟히지 않도록
길 가운데 있는 구더기를 길가로 옮겨놓았으며,
종이쪼가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종이쪼가리를 쓰레기로 방치하지 않고 고이 모셨습니다.
이런 피조물이 주님의 성전이 되었으니 우리 인간은
더더욱 주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선 자기가 성전이 되도록 자기 안에 성전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가슴에 성전을 마련하였다고 전기는 얘기합니다.
이는 성녀 글라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봉쇄를 동정녀의 봉쇄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영성에 따른 것이지요.
신부인 동정녀들은 신랑만을 위한 봉쇄구역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거기서 신랑과만 만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라라는 이런 봉쇄를 부정하지 않지만
봉쇄를 어머니의 봉쇄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자궁이라는 작은 봉쇄 안에 주님을 모심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는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자궁이 주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님의 성전이기에
그 어떤 속화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하나는 성전 정화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 파괴입니다.
우리에게도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주님을 만나는 안팎의 두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성당이 사교장이 되거나 장터가 되지 않도록
잡스런 것들을 다 치워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과 자궁이 하느님을 위한 성전이 되도록
하느님 아닌 것들을 품지 말아야 하고 있다면 치워야 합니다.
허물기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발생하지 않으면서
겉치레만 화려한 눈에 보이는 성당 건물은 헐어버리고
내 안에 성전을 세움으로
나를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우고,
나를 걸어가고 찾아가는 성전으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