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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33주일- 파멸과 아름다운 소멸

by 당쇠 posted Nov 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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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위령성월을 보내고 있고
오늘 주일 독서와 복음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죽음의 의미가 다르고 마지막 날의 의미가 다릅니다.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파멸이고 이 세상의 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태어남이고 새 세상의 시작입니다.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의 소멸이고 사람들과의 이별이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탈바꿈이고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 때 자전거 통학을 하였습니다.
찻길을 따라 가면 빨리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저는 공원길로 다녔습니다.
그 공원길은 특히 가을 단풍이 들 때 아름다웠는데
그 단풍을 보는 즐거움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웠고
돌아오는 길에는 내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등교하는 아침에는 보리라는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공원길에 들어서자 설레임이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날의 강한 비바람에 이파리가 몽땅 떨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빌어먹을 비바람 때문에
아름다운 단풍이 망가져버렸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잡친 기분으로 한참을 가다가보니
문득 비바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파리가 떨어진 것은 비바람 때문이 아니라
떨어질 때가 되어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코헬렛, 전도서가 얘기하듯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그래서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고
나올 때가 있으면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인데
저는 이때를 거부하고
이때의 현상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파리 몇 개 남아있으니 아직 가을이라고 고집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소멸의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한 것이고
심하게 얘기하면 추하고 애처롭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주 깊이 팬 주름을 감추기 위해
너무도 짙은 화장을 한 할머니 같은 것이지요.
주름과 백발을 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진짜 추한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면 주름과 백발을 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여유와 담담함은
마치 단풍이 소멸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듯
이것이 진짜 노년의 아름다움이고 소멸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생을 잘 산 인생의 아름다움입니다.

저는 한 자매를 알고 지냈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분인데 저보다 젊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암에 걸렸고 한 차례 수술을 하였는데 재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머리도 다 빠져 보기 민망스러울 정도인데도
이 자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있는데도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너무 고통스럽고 힘이 없는데도 살아있는 한 자기 재능을 가지고
끝까지 봉사하다가 죽는다고 하면서 음악봉사를 하러 다녔습니다.
음악봉사도 성악으로 하는 봉사이기에 제가 말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분의 인생을 보람 있게 잘 마무리하는 것이기에
안쓰럽지만 보면서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이 자매에게는 성전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없고
아름다운 돌들이 언제 무너질지에 대한 조바심도 없었습니다.
성전은 돌들로서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심으로 성전이 되는 것이고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돌들이 흩어져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안 계실 때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매의 아름다움과 육신은 결국 작년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불멸의 하느님을 모신 이 자매는
아름다운 성전으로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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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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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요셉 2010.11.14 16:48:40
    그렇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죽음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면서도 다시 때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저에게 상담을 하러오는 강박증이 있는 청년이 한 번도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아 뚜껑이 열릴 만큼 열이 받치는 순간,
    화는 낼 수 없고 “네가 나에게 인내를 가르치는구나!”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때일이 떠오릅니다.
    그가 나의 인생의 값진 스승이었다는 생각,

    죽을 운명이면서도 생명으로 거듭나는 길은
    다가오는 고통을 견디는 인내,
    그것만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움,

    그 자연스러움이 존재의 법칙이고 존재와 맞닿을 수 있는,
    유한이 무한과 손을 잡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이아침에 문득 깨닫습니다.
    깨닫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다는 또 다른 고뇌가 있지만,

    돈보스코 성인의 유해를 참배하기위해
    도반과 약속한 장소를 향합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 위해서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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